책임 없이 휘두를 땐 파멸 불러
새 정부 행정·입법 권력 다 가져
정도 벗어나지 않게 행사해야
21세기 대중문화를 휩쓴 마블 히어로들의 기원은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1년에 처음 등장한 캡틴 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상징이었다. 아이언맨은 냉전 시대 군비경쟁에 대한 자성에서 태어났다. 스파이더맨은 1960년대 미국 번영의 이면에 드리워진 도시 슬럼화와 청년들의 정체성 혼란을 반영한 존재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웅이기 이전에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전통의 강자 DC 코믹스가 슈퍼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 완벽하고 신적인 히어로를 내세웠다면, 마블 코믹스는 실패하고 후회하며 흔들리는 인간을 그렸다. 오늘날 마블이 더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얻게 된 이유다.

이들 중에서도 스파이더맨은 유독 인간적이다. 부모를 일찍 잃고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삼촌 손에 자란 피터 파커는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외톨이 청소년이었다. 그는 우연히 거미에게 물려 ‘큰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 힘은 곧 삼촌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불러온다. 삼촌 벤이 남긴 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테마이자 마블 세계관 전체를 아우르는 윤리적 토대다.
DC의 ‘조커’는 이 주제를 뒤집는다. 히어로가 아닌 빌런의 시선에서 그려진 이 영화는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조롱당한 약자가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큰 힘’이란 히어로의 초능력만이 아니다. 매스미디어, 자본, 사회 시스템은 훨씬 더 거대한 힘일 수 있다. 그 힘이 책임 없이 사용될 때, 그 끝은 조커라는 비극이 된다. 모든 히어로 서사는 ‘강함’이 아닌 ‘책임’이라는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 결국 현실에 대한 강력한 은유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핵 개발을 이끈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뒤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그의 탄식은 ‘큰 힘’을 손에 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윤리적 갈등에 휘말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블의 헐크는 바로 이 핵실험의 공포가 낳은 존재다. 인간이 만들어낸 힘이 통제 불능의 괴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시각화한 캐릭터다.
21세기 들어 AI라는 전례 없는 힘의 등장은 또 다른 오펜하이머들을 낳고 있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딥러닝의 아버지’ 제프리 힌턴은 AI 개발을 후회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챗GPT 개발의 주역인 일리야 수츠케버 역시 AI의 위험성을 거듭 경고하고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 유감스럽게도 “힘은 지혜가 아니라서” 인류는 10만년 동안 발견하고 발전하고 정복한 끝에 스스로를 실존적 위기에 밀어 넣고 있다.
힘이 지혜 없이 쓰인 사례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특히 정치권력은 그 한계와 위험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고대로부터 정치권력은 가장 직접적이고 제도화된 형태의 ‘큰 힘’이었다. 왕권은 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다수에 기대어, 독재는 종종 혁명을 앞세워 그 힘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책임 없는 권력은 언제나 파국을 불렀고, 그 대가는 결국 공동체 전체가 감당해야 했다.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이라는 격동의 시간을 지나온 한국 정치는 지금 다시 ‘힘과 책임’의 문제 앞에 서 있다. 당시 의회 권력을 쥔 거대 야당은 ‘줄탄핵’이라는 초유의 방식으로 국정 운영을 마비시켰고, 전직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계엄령’이라는 무기로 휘둘렀다. 두 권력이 남용되고 오용되고 충돌한 결과, 헌법과 민주주의는 중대한 위협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국민은 깊은 혼란과 피로의 시기를 견뎌야 했다.
6월 4일 출범한 새 정부는 압도적 의석을 바탕으로 행정과 입법 권력을 동시에 이끌고 있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개혁 추진의 동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기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사법부 권한 재편 시도가 더해지면서 권력의 균형을 둘러싼 논의도 고개를 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법관 수를 늘리고, 법원 판결을 헌법소원 대상에 포함하는 ‘재판소원’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대법원 판결 이후 헌재 판단이 추가되는 구조다. 노무현정부 시절 사법개혁을 이끌었던 진보 성향의 김선수 전 대법관도 이를 사실상의 ‘4심제’로 보고 우려를 표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재판관을 선임하는 구조지만, 권력 쏠림에 따른 균형 논란이 제기돼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제도 개편은 더욱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자칫 사법 독립과 삼권분립이라는 헌정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숙고와 공론화가 필요하다.
새 정부는 스스로를 ‘국민주권정부’라 이름 붙였다.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앞세운 선언이다. 이 이름이 수사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제도는 권력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는 책임의 무게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