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안 물건 정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관한 상자를 열게 되었는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꽤 많다는 사실이 우선 놀라웠다.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는 친구들과의 통신 수단이 모두 편지였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책상 서랍 안에 편지가 놓여 있기도 하고, 친한 친구들끼리는 교환 일기 같은 걸 쓰기도 했다. 때로 롤링 페이퍼 같은 걸 받을 때도 있었고 단연코 많이 보내고 받았던 것은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정리를 하긴 했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것도 있다. ‘사랑하는 우리 딸’로 시작하는 엄마가 보내준 편지다. 우리 엄마와 나는 자주 싸웠지만 편지에서만큼은 엄마도 나도 ‘사랑하는 우리 딸’ ‘사랑하는 엄마’로 운을 떼곤 했다. 서두만 그렇지 사실은 건강을 조심하라는 평범한 이야기들임에도 우리 엄마는 나에게 편지를 자주 건넸다. 싸우고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내가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편지를 넣어두기도 했었다. 그 영향인지 나는 소설에서도 화자인 딸이 엄마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이야기를 쓴 적도 있다.
편지를 소재로 한 은근한 매력의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앤소니 홉킨스가 서점 주인으로 연기한 ‘84번가의 연인’이다. 제목만 보면 러브스토리 같지만 미국에 사는 여성 작가와 영국의 서점 주인이 거의 20년 동안 편지만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영화다. 영국의 서점 주인은 희귀한 고전을 구해 미국의 작가에게 보내주고 미국의 작가는 전쟁 후 물자가 부족한 영국의 서점 주인에게 책값과 식료품을 보낸다. 이들은 처음에는 비즈니스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가족들끼리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한다. 물론 두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만나지 못한다. 만나지 못해도 만난 것 같은 힘을 주는 편지, 최근엔 거의 써본 적이 없다. 괜히 이러면서 또 문구점에 가 편지지를 산다고 쓸데없는 소비나 할 태세다. 대신 엄마의 편지 하나를 촬영해 휴대폰 사진으로 저장해 둔다. 엄마가 힘을 주어 꾹꾹 눌러쓴 필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강영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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