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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은 본질적 덕목이며… 시대 초월한 핵심 가치일까?

입력 : 2025-06-14 06:00:00 수정 : 2025-06-12 20: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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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전 ‘창조’는 신의 영역
인간은 ‘발견’ ‘재현’ 존재로 인식
20세기 중반 이후 핵심 능력 평가
기업 등 사회 전반서 창의성 주목
저자 현대 변화 속도서 이유 찾아
계층·인종·성별적 불평등도 분석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새뮤얼 W 프랭클린/ 고현석 옮김/ 해나무/ 2만2000원

 

‘창의성(creativity)’. 현대사회에 요구되는 핵심 능력 가운데 하나다. 모두가 ‘창의적’이 되고 싶어한다. 기업은 창의적인 인재를 원하고, 학교는 창의적 교육을 강조하며, 정부는 창의경제를 내세운다. 창의성은 예술 분야는 물론 기업 경영, 교육, 광고, 도시 정책, 심리학 등 사회 전반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이다. 개인은 스스로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고, 사회는 창의력을 요구한다. 창의성은 나만이 가진 것, 개성의 표현이기도 하고 기업에서 수익 창출을 위한 전략을 수립할 때나 사회 문제를 해결할 때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러다 보니 ‘창의성’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된다.

신간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는 창의성이 어떻게 근대 이후의 권력, 문화, 경제와 얽히며 현재 ‘창의성 숭배 사회’를 만들어왔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창의성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덕목이며 시대를 초월한 가치일까? 문화사연구자인 저자는 창의성이 어떻게, 언제, 왜 이토록 열광적으로 숭배받는 가치가 되었는지를 문화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책에 따르면 ‘창의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창의성’이라는 단어조차 20세기 중반까지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1950년 미국 심리학회 연례 회의에서 당시 회장이었던 조이 폴 길퍼드는 창의성 연구가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심리학 논문과 서적 중 단 0.2%만이 “창의적 행동”?발명, 설계, 고안, 작곡, 기획 같은 활동?을 다루고 있었으며, 심리학자를 양성하는 데 사용되는 교과서에서는 그런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길퍼드는 동료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촉구했고, 그들은 실제로 행동에 나섰다. 그 결과, 이후 10년 동안 창의성에 관한 새로운 책과 논문의 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된 이래 집필된 모든 심리학 서적의 총량에 필적했다. 이 숫자는 1965년까지 두 배로 증가했고, 그다음 해에도 또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38쪽)

새뮤얼 W 프랭클린/ 고현석 옮김/ 해나무/ 2만2000원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창조’라는 개념이 주로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인간은 단지 ‘발견’하거나 ‘재현’하는 존재로 인식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사회에서 과학 기술과 군사 전략, 심리학의 발전과 함께 ‘창의적 사고’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인간의 마음을 계량하고 측정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창의성은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됐다.

1950년대 미국 심리학자 조이 폴 길퍼드의 연구는 창의성을 ‘측정 가능한 인지 능력’으로 정의하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미국은 소비자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소련과의 이념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유로운 사고’, 즉 ‘창의성’이 강조됐다. 당시는 곧 창의성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작용하게 된다.

저자는 창의성이 단지 심리학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는지를 보여준다. 1960, 7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자아 탐색의 붐은 창의성을 개인 해방의 수단으로 포장했다. 창의적인 사람은 억압된 질서로부터 자유롭고, 기존 제도에 구애받지 않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인물로 이상화됐다. 기존의 지혜를 거부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창의적인 것은 좋은 것일 뿐 아니라 창의적인 인물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통념까지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창의성에 관한 이런 낭만적 신화를 비판한다. 창의성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자기 관리, 자기 계발의 강박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창의적인 인간이 되라는 사회적 요구는 개인을 해방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기준과 규율을 통해 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창의성은 기업 경영, 광고, 교육, 도시 정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마케팅 도구로 활용되며, 철저히 상품화된다. 스타트업 문화, 워크숍, 브레인스토밍 같은 기법들은 창의성을 조직화·규격화하며, 결과적으로 창의성을 ‘표준화된 수행’으로 전락한다. ‘틀을 깨라’는 구호가 새로운 틀로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창의성 담론이 갖는 계층·인종·성별적 불평등도 꼬집는다. 창의적인 주체로 상정된 인물은 주로 백인 중산층 남성이다. 이들 중심의 문화 속에서 여성, 유색인종, 하층계급은 여전히 ‘재능’이나 ‘창의성’이 결여된 존재로 비친다. 창의성은 보편적 인간 능력이 아니라 특정 사회계층이 독점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점을 우려한다.

현대인은 왜 이토록 창의성에 집착하게 됐나?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변화 속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끊임없는 혁신과 적응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창의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동시에 그것은 불안한 자아를 보상하고 위로해주는 하나의 신화적 장치로 여겨진다.

저자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집착해 창의적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고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폄하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사회의 핵심 개념인 창의성에 숨겨진 사회적 열망을 파헤친 유용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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