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벽·화재감지·경보설비 설치 지원
외인 근로자 교육 강화 등 내놨지만
“내부 검토” 말만 되풀이 실현 저조
전문가 “정책 우선순위 정해
법 개정·정부 주도 구별해야”
“정부 정책 지원 아니면 제재
생계 급한 소규모 사업장들
지원책을 활용할 여력 없어”
리튬전지 폭발로 노동자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리셀 참사(2024년 6월24일) 1주기가 임박했지만 정부가 참사 이후 내놓은 여러 대책들 상당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올해 안에 개정하겠다고 한 법, 규칙, 고시도 많은 경우 해를 넘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전문가들은 결국 정부가 당장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내놨던 대책이라 “예견된 일”이란 평가를 내놨다.

실제 정부는 아리셀 참사 후 세 달도 채 되지 않아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종합 대책을 두 차례에 걸쳐 쏟아냈다. 사업장 내 비상구가 제대로 완비돼 있지 않아 피해를 키웠던 것으로 드러나자 비상구 형광 표시 등 지원 방안을 내놓거나, 사망자 다수가 이주노동자였던 점을 고려해 그간 일부 비자에 제한해 진행되던 안전교육을 전체 이주노동자 대상으로 의무화하겠다고 약속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책 상당수가 최근까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심지어 지난해까지 완료하기로 했던 과제조차 이미 한 해의 절반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부 관계자는 “내부 검토 중”이라거나 “막바지 단계”라고 해명할 뿐이었다.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참사 후 3주가 채 지나지 않은 지난해 8월 ‘외국인 근로인 근로자 및 소규모 사업장 안전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엔 비상구 형광 표시 등 작업장 안전 디자인 개선, 화재 감지·경보 설비 지원을 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됐다.

더불어민주당 박홍배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화재 감지·경보 설비 지원의 경우 현재까지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작업장 안전 디자인 개선 또한 지원 작업장 수가 3곳에 그쳤다. 고용부 측은 이와 관련해 “대상 사업장들이 노후·위험공정 개선을 우선 신청해 실적이 저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용부가 이주노동자 안전교육 강화를 위해 도입하겠다고 한 ‘안전보건 통역사’ 자격 제도도 여전히 ‘검토 중’인 상황이다. 이 제도는 외국인 유학생, 결혼 이민자 대상으로 외국인 안전교육 전문강사 자격을 부여하는 안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지난달 관련 연구용역 계약을 맺었고, 국가기술 자격에 포함할지 말지 등을 향후 살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9월엔 총 37개 과제를 포함한 ‘전지 공장 화재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여기엔 모든 이주노동자가 업무 현장에 투입되기 전 의무적으로 안전보건교육과 소방안전교육을 듣도록 법을 개정한다는 계획이 포함됐다. 현재는 비전문취업(E-9) 비자와 방문취업(H-2) 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에게만 교육 수강의무가 있다. 재외동포(F-4) 비자 외국인이 단순노무 직종에 불법 취업을 하면 안전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실제 건설근로자공제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건설업에 종사한 근로자 14.7%가 외국인이었고, 이들 체류자격을 보면 F-4 비자가 50.4%로 전체의 절반이었다.

아리셀 화재 참사 사망자도 18명이 외국인 근로자였고, 이 중 11명이 F-4 비자, 2명이 결혼이민(F-6) 비자였다. 다만 고용부는 1년간 모든 외국인 근로자 대상으로 기초안전보건교육을 확대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시행했지만 법 개정엔 아직 첫발도 떼지 못한 상태다. 고용부 관계자는 “법제화는 국회 사정으로 늦어진 면이 있다”고 했다.
이처럼 정부가 올해까지 개정하겠다고 한 법이나 규칙, 고시 등도 사실상 내년으로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 소방청은 화재 위험성이 높은 리튬전지를 화재예방법에 따른 특수가연물로 지정하고 제품 적재·보관, 내화구조·방연재료 사용 등 관리기준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관련 연구용역이 여태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소방청 관계자는 “연말 연구용역 결과가 나오고 나서 법 개정 논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리튬전지 제품의 저장·취급 관리 강화도 마찬가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리튬전지를 화재예방법에 따른 특수가연물로 지정하고 보관·취급·공정상의 구체적 기준을 마련한다고 했다. 산업부는 현재 산업계와 전문가 의견을 듣고 있으며 공청회 1번, 간담회 2번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향후 의견 수렴을 바탕으로 고시 개정에 나설 예정이다.
이미 목표 일정을 지키지 못한 과제도 여럿 확인됐다. 환경부의 경우 지난해 유해화학물질 안전 가이드를 마련하고 폐전지 보관·운반 안전기준을 개발하겠다고 밝혔지만 여태까지 마무리짓지 못한 상황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모면용으로 정책을 열거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국회에 책임을 떠넘길 일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제라도 우선순위를 정해 정책을 재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법 개정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과 지금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소규모 사업장 안전 강화 대책이 미진한 데 관해서는 단순지원 제도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온다. 권혁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정부 정책은 ‘지원’ 아니면 ‘제재’인데 중소사업장 경우 생계가 급한 와중에 이런 지원책을 활용할 여력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며 “사업장 안전에 노사 양측이 모두 공감하게 하고 안전 감수성을 끌어올리는 게 근본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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