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지서 싹튼 정원사의 꿈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맏이로 태어나
셋방살이 하며 고향의 자연 그리워해
어머니 응원으로 대학서 원예학 전공
아침고요수목원 일군 청년
‘인생멘토’ 한상경 교수와 운명적 만남
가평에 터 잡고 우여곡절 끝에 문 열어
연간 100만명 찾는 ‘나들이 명소’ 각광
솔라시도 프로젝트에 ‘올인’
국립세종수목원·화담숲 등 조성 자문
해남에 친환경 생태도시 ‘야심찬 계획’
“젊은 시절처럼 다시 가슴 뛰게 만들어”
국립세종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경북 봉화), 국립생태원(충남 서천), 화담숲(경기 광주), 휴애리자연생활공원(서귀포시) 등 국립수목원에서 민간 정원까지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거의 없다. 그를 ‘수목원의 마법사’로 부르는 이유다. 30여년 전 경기 가평군 허허벌판 땅을 연간 100만명이 찾는 우리나라 대표 정원, 아침고요수목원으로 키운 이병철(57) 산이정원 원장 얘기다. 그는 30년 넘게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고향’을 등지고 몇 해 전 머나먼 남도의 끝자락 해남으로 훌쩍 떠났다. 서울 여의도의 약 7배 크기인 바다를 메운 땅 2090만㎡에 한국을 대표하는 거대한 정원도시를 만드는 ‘솔라시도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을 넘길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마무리하지 못할 수도 있는 무모한 도전이지만 이 원장은 오늘도 한 그루 나무를 정성껏 심는다. 자신이 다 못 이루더라도 바통을 이어받은 미래세대, 또 그 후대의 세대가 함께 만들어갈 정원이기 때문이다.
◆가난도 꺾지 못한 정원사의 꿈

‘태양(Solar)’과 ‘바다(Sea)’가 어우러진 곳이라는 뜻을 담은 솔라시도 프로젝트는 주거, 산업, 에너지, 교육, 관광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미래형 정원도시를 개발하는 대규모 민관협력 사업이다. 전형적인 도시 형태와 달리 정원이 중심이 되는 도시로, 거대한 정원 9개를 먼저 만들고 인프라 시설이 차례로 들어선다. BS그룹이 전라남도·해남군과 손잡고 진행하는 솔라시도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은 2019년 완성된 ‘태양의 정원’이다. 48만평 규모 태양의 정원은 국내 최대 용량인 98MW 전기를 생산하는 태양광 시설을 갖췄다. 사람의 심장처럼, 거대한 솔라시도를 살아 움직이게 할 심장이 바로 태양의 정원이다. 보통 태양광 발전소는 산을 깎아서 흉물처럼 만들어지곤 하는데 태양의 정원은 갈대밭에 만든 친환경 발전소다. 특히 전체 면적의 10%를 정원으로 꾸며 세계 최초로 발전소 안에 들어선 정원을 완성했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나라 정부 관계자들이 견학하러 올 만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두 번째 정원은 꽃과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땅에 지난해 5월 문을 연 산이정원이다. 이 정원은 아름다움에 매료된 여행자들이 1년 동안 10만명 넘게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들 정원을 완성한 이가 바로 이 원장이다. 최근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에 위치한 산이정원을 방문하니 마른 체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의 이 원장이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로 맞았다. 평생을 꽃, 나무와 지낸 덕분인지 욕심 하나 없어 보이는 표정에서 맑고 투명한 영혼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병철’이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충남 보령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어떻게든 자식은 가난을 벗어나기를 소원하며 삼성그룹 창업주와 같은 이름으로 지었다고 하더군요. 이름으로나마 가난의 한을 풀어 보려 한 거죠.” 어린 시절을 추억하던 그는 갑자기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난에 짓눌려 꿈과 희망조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던 이 원장은 어떻게 수목원의 마법사가 됐을까. “아버지가 건설회사에 취직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정든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했어요. 도회지에서 삭막한 셋방살이를 하면서 늘 고향의 자연이 그리웠죠. 이미 그때 정원사를 향한 꿈이 싹 튼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가난하다 보니 빨리 돈 벌어 집 장만하고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돼 버렸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중학생 때부터 우유 배달과 공사장 막노동, 과일 장사, 식품가공 공장 근로자 등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어느 겨울 새벽 퇴근길에 밤하늘의 별을 보다 인생이 막막한 삶이 너무 측은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방황을 거듭하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돼 준 이가 어머니였다. “어머니 소개로 만난 교회 목사의 조언대로 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펼쳐 들고 하고 싶은 일을 가나다순으로 찾아봤어요. 그런데 ‘꽃’, ‘자연’, ‘정원’(대목)에서 눈길이 멈추고 기분이 좋아져요. 그때 정원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당시 삼육전문대 원예학과에 진학했답니다.”
◆아침고요수목원을 일구다
이 원장은 대학에서 ‘인생 멘토’이자 아침고요수목원 설립자인 한상경 교수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한 교수는 제대로 된 한국 수목원을 만들려는 꿈을 꾸고 있었고 이 원장은 한 교수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같은 꿈을 꾸었다.
“졸업하자마자 수목원의 첫 직원이 됐어요. 교수님은 투자자를 모으고 저는 중고트럭을 끌고 법원 경매에 나온 땅을 찾아 전국을 뒤졌죠. 1994년 가평의 땅을 사 수목원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투자를 약속했던 분들이 사업성이 없고 앞으로 돈이 너무 들 것 같다며 그만 투자를 철회하고 말았어요. 교수님이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오는 우여곡절 끝에 1996년 꿈에 그리던 수목원을 열었습니다. 화장실, 식당 등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수목원을 개장한 탓에 방문객들에게 욕을 엄청 먹었답니다. 다행히 최진실, 박신양 주연 영화 ‘편지’ 등의 촬영 무대로 알려지면서 가족 나들이 명소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지금은 연간 100만명이 찾는 우리나라 대표 정원이 됐죠.”
아침고요수목원은 이 원장의 분신과도 같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큰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 아침고요수목원을 떠나게 된다. “가난하던 셋방살이 시절에도 손톱에 봉숭아를 물들이면서 정원사의 DNA를 심어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익숙하던 공간이 너무 힘들더군요. 어디를 가도 어머니가 생각나요. 뭘 해도 신이 나지 않았죠. 새로운 일에 도전해 힘든 시기를 극복해보라는 지인의 조언을 듣고 아침고요수목원을 떠나기로 결정했답니다.”
당시 아침고요수목원 부설 정원디자인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던 이 원장은 국내외 유명 수목원·정원 컨설팅에 참여할 정도로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많은 곳에서 컨설팅 자문을 요청했는데 그중 하나가 솔라시도 프로젝트다. “BS그룹 요청으로 해남을 찾았는데 정원을 만들기에는 너무 무모할 정도로 황량하더군요. 하지만 그룹 관계자의 진심이 담긴 프로젝트 설명에 큰 감명을 받았어요. 척박한 간척지에 친환경 생태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아침고요수목원을 만드는 꿈을 꾸던 시절처럼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었어요.” 이 원장은 그 자리에서 솔라시도 프로젝트에 남은 인생을 모두 쏟아붓겠다고 결심했단다.
◆솔라시도 프로젝트로 인생 2막
솔라시도 프로젝트는 2005년부터 시작됐지만 투자를 구하지 못해 진척이 없었다. 염분이 많은 땅이고 바람도 심해 나무와 꽃이 제대로 자랄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막에 도시를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나무가 살 수 없는 땅에 정원을 만들려니 아침고요수목원을 만들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어요. 염분이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고 거센 바람에도 나무가 버텨야 했기에 태양의 정원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장은 별명에 어울리게 첫 번째 정원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태양의 정원 인근에 국내 최대 탄소중립 에듀센터를 설립하는 환경부의 500억원 지원 사업에도 선정됐다. 세계 최대 규모 글로벌AI데이터센터 건립도 확정되면서 에너지와 환경이 어우러지는 미래도시의 기반이 마련됐다.
워낙 많은 고초를 겪은 덕에 산이정원은 그보다 좀 수월했다. “태양의 정원이 심장이라면 산이정원은 솔라시도의 얼굴이에요. 척박한 간척지에 정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뛰어넘은 작품입니다. 다른 수목원이나 정원은 1년 내내 꽃을 교체하는데 산이정원은 일년생 식물은 심지 않습니다. 금작화 등 한 번 심으면 계속 피고 지고 자라는 여러해살이꽃을 심어 지속가능한 정원으로 완성했답니다. 산이정원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방문객들이 깜짝 놀랄 정도니 이 정도면 완성도가 높다고 자부해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이런 산이정원의 잠재력을 인정해 지난 4월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선정했다. 산이정원은 마치 미술관을 투어하듯 체험하고 미래세대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콘셉트로 15개 주제원을 꾸몄다.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입구 맞이 정원을 시작으로 전체 정원을 다 돌아보고 나면 소설책 한 권이나 영화 한 편을 읽고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산이정원을 더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곳곳에 놓인 조각 작품이다. 이영섭 작가의 ‘어린왕자’ 등 볼거리가 많은데 하늘마루에 오르면 만나는 유영호 작가의 ‘브리지 오브 휴먼(Bridge of Human)’이 압권이다. 몸을 숙이고 두 팔을 곧게 펴 스스로 다리가 된 거인을 형상했는데 팔 위로 다양한 인종과 옷차림의 사람들이 서 있다. 지구와 환경,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을 포용하며 우주를 향해 활짝 열린 인간을 표현했다.
이 원장은 최근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와 온라인 게임과 휴대전화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높이는 프로그램 개발에도 착수했다. 청띠제비나비가 사는 나비의 정원에서 진행되는 어린이 명상 프로그램과 연계해 뇌파측정과 다양한 연구를 토대로 미래인재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만들 예정이다. 또 여름휴가철을 맞아 물놀이 테마정원과 에어바운스를 마련했고 다양한 숲 체험 프로그램도 완성했다.
“남쪽은 인구 소멸이 심각해요. 특히 전남 서남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죠. 순천은 국가정원이라도 있지만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다행히 산이정원이라는 큰 마당이 하나 생겨났어요. 평일은 약 1500명, 주말은 약 3000명이 방문할 정도로 많이 찾아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산이정원은 16만평 중 1단계로 5만평이 완성됐고 나머지는 내년 봄쯤 공개될 예정입니다. 서남부권 관광명소를 목표로 유기농 테마정원, 어린이 놀이정원, 캠핑숙박존, 반려동물정원, 동화정원을 더할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이병철 산이정원 원장은 …
●1968년 충남 보령 출생 ●제물포고·삼육대학교 원예학과 졸업 ●서울시립대 대학원 환경원예학과 졸업(석·박사) ●아침고요수목원 총괄이사·정원디자인연구소장(1994년 6월∼2019년 2월) ●세계가드닝월드컵 쇼가든 초청작가 ●삼성 에버랜드 수목원 조성위원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운영위원 ●산림청 도시숲 평가위원 ●한국 산림복지휴양학회 이사 ●대한민국 조경대상 민간부문 수상(태양의 정원·2022년) ●올해의 도시설계 심사위원 대상(정원도시 솔라시도·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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