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패스트 팔로어’ 머물러 한계
새 기술 로드맵 선도 中 참고를
정권 교체 인한 정책 단절 극복
‘브레인 홈 코리아’로 인재 유인
기술패권 시대에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이 여전히 선진국을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어’에 머물러 있고,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정책 단절과 방향 전환으로 정책 지속 가능성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직속으로 ‘기술주권 워룸(War room)’을 만들어 정권을 초월한 과학기술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최종현학술원은 8일 공개한 ‘기술패권 시대, 흔들리지 않는 과학기술 국가 전략’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는 “대통령직인수위 없이 국정이 바로 시작되는 상황에서 과학 기술과 같은 중장기 과제가 국민적 논의와 공감의 과정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정파를 초월한 독립적 시각으로 보고서를 출간했다”고 말했다.
보고서에서 염한웅 포항공과대(포스텍) 교수는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여전히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시대적 추격자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며 “과도한 선택과 집중이 ‘퍼스트 무버’로 가는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대 모든 정부가 한정된 예산으로 가시적 성과를 도출하는 데 치중해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가 이뤄졌는데, 이는 과학기술 생태계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저해해 장기적 혁신 역량을 악화시킨다는 주장이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추격자를 넘어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의 로드맵을 선도 중인 중국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중국은 인구와 시장의 절대적 규모, 산업 다양성까지 갖추고 있어 어떤 산업에 뛰어들면 압도적인 속도와 스케일로 발전시킨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가 발표하는 대학·연구기관 경쟁력 순위인 ‘네이처 인덱스’에 따르면 중국은 2016년 상위 10개 기관에 베이징대 한 곳만 이름을 올렸는데, 지난해엔 2∼9위를 모두 자국 대학으로 채워넣었다. 네이처의 국가별 혁신 순위에서 중국은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정동 교수는 이에 “한국은 남을 뒤쫓기만 해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독창적 원천기술을 제시하지 못하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정권 교체로 인한 과학기술 정책 단절성도 문제로 꼽았다. 이전 정부에서 추진한 대형 국가연구사업이 축소·폐지되고, 새 정부에서 새로운 사업이 우선시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정부 기조에 맞춰 연구 주제를 수정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정부가 단기 성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과학기술이 지닌 본질적이고 장기적인 특성과 충돌하고 있다는 점도 우려로 언급됐다.
전문가들은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체 불가능한 역량 먼저 키워야한다며 ‘기술주권 워룸’ 설립과 인재 확보 전략을 제시했다.
이정동 교수는 “기술주권 이슈는 과학기술을 넘어 외교, 안보, 산업, 인재 정책이 얽힌 복합 영역”이라며 워룸 설립을 제안했다. 부처 간 정보를 통합하면 국가 차원의 기술 감시, 외교 연계, 연구개발 방향 설정 등에서 유기적인 대응체계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는 “(인재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우수 인재를 유인하고 유지하는 전략이 중요하다”며 ‘브레인 홈 코리아’ 인재 확보 전략을 제시했다. 단순한 두뇌 유입을 넘어 국내외 인재 모두가 한국을 연구와 삶의 터전으로 여기기 위해 비자 제도를 개편하고 가족 단위의 정착을 지원하는 종합적 인재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이어 “중국처럼 과학기술인이 국가 전략의 중심에 서고 실질적인 예우를 받는 시스템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연구자에 대한 정당한 성과 보상과 과학기술인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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