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지배 일컫는 ‘가스라이팅’ 유래
히치콕 영화 ‘로프’ 원작 희곡 수록도
빛은 흔히 진리와 앎을 상징하지만, 영국 극작가이자 소설가 패트릭 해밀턴(1904∼1962)의 희곡 ‘가스등’(Gas Light)에서 상징은 뒤집힌다. 이 작품에서 가스등의 빛은 혼란과 기만의 수단이자 심리 조작의 상징이다.
장기간에 걸쳐 상대방이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을 주입하는 것. 이를 통해 피해자가 스스로를 불신하고 자주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심리적 지배 행위. 잘 알려진 ‘가스라이팅’ 수법이다. 이 단어가 유래한 해밀턴의 희곡 ‘가스등’을 포함한 희곡집이 최근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됐다.

오늘날에는 조지 큐커가 감독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가스등’(1944)이 더 유명하지만, 원작 희곡은 1940년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1295회나 상연된 기록적인 흥행작이었다.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런던 한 가정. 극은 남편 매닝엄이 심리적 속임수로 아내 벨라의 정신을 지배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매닝엄은 벨라가 시계를 훔쳤고, 액자를 몰래 치웠으며, 강아지를 학대했고, 영수증을 잃어버렸다고 믿게 만든다. 그녀를 맹렬하게 몰아붙이며 정신이 불안정하다고 세뇌하기도 한다. 아내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경함한 것과, 이를 믿어주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큰 혼란을 느낀다. 아내는 남편의 의도대로 정신병자가 되어간다.
벨라에게 벌컥 화를 내고 매닝엄이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방 안을 비추던 가스등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위층에선 유령 같은 발소리가 들려온다. 다락방의 가스등을 켜는 매닝엄 탓에 집 안 다른 가스등들이 희미하게 깜빡인 것. 15년 전 보석을 빼앗기 위해 한 노부인을 살해한 추악한 범죄자인 매닝엄은 매일 밤 다락방에서 사라진 보석을 찾는다. 그가 신분을 위조해 벨라와 결혼한 것도, 벨라를 정신병자로 모는 것도 모두 보석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매닝엄을 의심한 수사관이 매닝엄 부부의 집에 들이닥치며 극은 전기를 맞이한다. 결말부, 매닝엄은 의자에 앉은 채 포박된 상태다. 벨라는 면도칼을 들고 있다. 남편은 가스라이팅 수법을 더 세게 써가며 아내에게 밧줄을 잘라 탈출하게 해달라고 회유한다. 벨라는 그가 부여한 ‘미친 여자’ 역할을 역이용한다. “미친 여자가 어떻게 남편이 탈주하도록 도울 수 있겠어요? 참 안됐군요. (…) 수사관님! 어서, 이 남자를 데려가세요!”
해밀턴은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예리하게 간파하며 심리 스릴러와 드라마 장르에 두각을 나타낸 작가다. 인물의 내면세계에 깊이 파고든 환각적 문장을 즐겨 썼고, 특히 왜곡된 인식과 자학적 사고, 강박적인 집착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가 불과 25세 나이에 발표한 또 다른 성공작 ‘로프’(1929)도 이 책에 수록됐다. 작품은 지루한 부유층 청년 두 명이 재미로 동료 학생을 살해한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이다. 니체 ‘초인’ 개념에 심취한 둘은 자신들을 우월한 존재라고 믿으며 평범한 친구 로널드를 아무런 동기도 없이 교살해 시체를 상자 속에 숨긴다. 그리고 시체를 숨긴 상자 위에서 데이비드의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 저녁 파티를 연다.
희곡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을 매료했고, 1948년 영화화됐다. 영화 전체가 편집 없이 원테이크로 촬영된 듯한 착시를 주는 이 영화는 히치콕의 가장 실험적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가학성과 피학성, 권력과 지배의 심리적 역학을 탐구하는 풍부한 심리 텍스트로 읽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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