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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의역사산책] 기자 채만식과 지식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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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02 23:28:41 수정 : 2025-06-02 23: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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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강제이주된 조선인 삶 고발
일제 말 친일행위 통렬하게 반성하기도

소설가 채만식(蔡萬植)이 6·25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 11일 48세로 별세했다. 그는 오랫동안 폐환으로 고생하다가 이리(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에서 정양하는 가운데 병세 악화로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6월 14일 자 부음 기사에서 채만식을 ‘전 본사 사원이며 이 땅의 중견작가’로 소개하였다. 그의 주된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필자에게 채만식은 여타 어느 소설가보다 매우 현대적인 작가로 다가왔다. 그것은 ‘레디메이드 인생’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이 사실성에 더해 풍자와 해학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가 중학교 3학년 말에 읽은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은 조선 지식인의 위선과 고뇌, 그리고 일제하 고학력 실업문제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이 시절에 처음 알게 된 룸펜 지식인의 모습이 혹시 나의 장래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때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일제의 민족차별 속에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문학교를 마치거나 일본 유학을 했건만 그들을 받아줄 일자리가 조선에서는 없었다. 그나마 그들이 갈 자리는 기자, 교사가 다였다. 물론 민족적 양심과는 상관없이 문관 고등시험에 응시하여 합격만 한다면 출세는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는 극소수였다. 이 자리 역시 일본인들이 대거 차지했기 때문이다. 근대 학력주의가 점차 퍼져가고 있었지만 민족차별의 벽이 여전히 가로막고 있어 고학력일수록 취직하기 힘들었다. 그가 강화도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1924년부터 1936년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생계를 꾸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그런데 채만식은 단지 생계형 기자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벌인 구제사업을 취재하며 그 문제점을 파헤치는 민완기자였다. 조선총독부가 1934년 대홍수로 낙동강 유역에서 조선인 이재민이 대거 발생하자 이주민 구제를 구실로 이들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로 이주시켜 버렸다. 그는 한반도 북부로 이주해 간 조선인의 삶이 과연 어떠한지를 취재하기 위해 1934년 12월 추운 겨울과 먼 길을 마다치 않고 함경북도 회령 등지를 방문하였다. 탄광 이주민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면서 이주민의 안착을 외면하는 조선총독부의 행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폭로했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의식하여 자세히 보도하지 못했지만 조선인 이주민의 ‘단장(斷腸)의 망향가(望鄕歌)’를 가능한 한 전하고자 했다. 기자 시절의 이러한 취재 경험이 훗날 그의 명작 ‘태평천하’, ‘탁류’ 등을 낳은 원천은 아니었을까. 특히 ‘탁류’에서는 1930년대 군산 거주 조선인들의 삶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필자의 근대 군산 연구도 채만식이 그려낸 군산의 생생한 모습에서 출발하였다. 한반도에서 미곡 최대 유출지로 경기가 가장 좋았지만 민족별 양극화가 가장 심한 곳도 군산이었다.

물론 일제 말기 채만식이 저지른 친일 행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해방 후에 발표한 소설 ‘민족의 죄인’에서 이광수처럼 반성을 빙자한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기보다는 친일 행위를 고백할뿐더러 자괴감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통절히 반성하고 있다. 조선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취재하고 보도한 기자로서의 성실성과 책무감이 그의 반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오늘날 기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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