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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루게릭병원 문 열렸지만… 간병비 문턱에 가족들 ‘신음’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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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21 19:08:49 수정 : 2025-05-21 22: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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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입원하면 정부 지원 끊겨
법제도 미비… 아직 갈 길 멀어

故 박승일 선수 유지 이어 3월 개원
환자 의식 또렷… 간병 중요성 더 커

병원 측 전문 인력 육성 온힘 불구
간호사·간병인 구인난에 ‘허덕’

정부 뒤늦게 개선 방안 마련 검토
일본 중증 환자 병원 27곳과 대조

“지원사에 일부 의료 행위 허용을”

서울 강남에서 차로 30분을 내달리면 경기 용인에 문수산과 불곡산, 문형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 요양병원이 나온다.

 

한가하고 고요한 자리에 지난 3월 31일 문을 연 승일희망요양병원이다. 국내 최초 루게릭병 환자 전용 병원으로 프로농구 코치였던 고 박승일씨가 2011년 승일희망재단을 설립해 환우와 가족들의 일상을 돕기 위한 병원건립을 추진한 지 14년 만에 이뤄낸 결실이다. 35만명 기부자(총 118억8000만원)가 힘을 보태고 국비 120억원을 합쳐 건립된 병원은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5000㎡에 76병상을 갖췄다.

 

지난 4월 28일 승일희망요양병원에서 만난 박성자 승일희망재단 이사가 병실마다 마련된 대형 화장실 등을 설명하고 있다. 루게릭 환자의 경우 감염 우려가 높아 대면 접촉은 최소화하면서 병원 밖 공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최상수 기자

지난달 28일 승일희망요양병원을 찾았다. 개원 이후 언론 방문을 허용한 건 처음이라고. 환자들의 중증도가 높아 일주일에 매주 2∼3명만 입원 수속을 진행하기 때문인지 병원은 한산했다. 그동안 입원한 환자 수는 19명. 이달 말까지 5명이 추가 입소할 예정이다. 입원 시 가족이 함께 머물며 편한 자세, 의사소통 방법, 복용 약물과 환자의 취향 등 환자에게 필요한 사항들을 전달하는 데 4∼5일 걸린다고 한다. 병원 곳곳에는 환자들을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묻어난다. 병실 창문은 환자가 누운 채로 산과 하늘 등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낮고 크게 배치했다. 병원 옥상도 어렵지 않게 침대를 밀고 갈 수 있다. 답답함을 느끼는 환자들의 경우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엘리베이터와 병실에 딸린 화장실은 침대째 들어갈 수 있도록 큼직하고, 1층에는 환자들이 누운 상태에서 모여 영화를 볼 수 있는 강당도 만들어졌다. 박 전 코치의 누나인 박성자 승일희망재단 이사는 “창이 커서 누워서도 바깥 풍경과 하늘이 잘 보인다. 옥상도 정원처럼 꾸몄다”며 “육체에 정신이 갇힌 것 같은 루게릭 환자들이 병원에서도 갇힌 느낌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이건 승일이의 바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승일희망요양병원은 루게릭병 환자와 가족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지만 중증환자 간병인·간호사 구인난과 높은 간병비 부담, 운영상 어려움 등 풀어야 할 현실적 난제도 적지 않다.

 

루게릭병은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신경세포가 점점 파괴돼 근육이 약해지고 위축돼 결국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병이다. 생존 기간은 보통 2~3년 수준. 입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해 코나 복부로 삽입하는 비위관이나 위루관 시술을 통해 영양을 공급 받고, 말을 할 수 없어 눈동자의 움직임과 눈 깜빡임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마지막에는 호흡근육까지 움직이지 않아 인공호흡기를 달게 된다. 최근에는 관련 의술이 발달해 수명이 10년 이상 늘어난 경우도 있다. 바꿔 말하면 길게는 10년이 넘도록 눈만 움직일 수 있는 환자라 간병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는 얘기다.

 

박성자 승일희망재단 이사는 “루게릭병 환자들은 다리가 저려도, 가려워도, 눈물이 흘러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인지능력과 의식은 또렷해 평생을 가위에 눌린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표현도 움직임도 없는 이들 환자는 일반 요양병원에 가면 사실상 ‘식물인간’ 취급을 당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국내 첫 전문요양병원이 생겼으니 당사자와 가족들은 얼마나 반가울까. 오랫동안 많은 시민의 관심과 도움으로 승일희망요양병원이 첫발을 뗐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강성웅 승일희망요양병원장.

◆간호사·간병인 구인난에 환자 가족들의 경제난

 

중증희소근육병 환자들에 특화된 간병인 교육·육성에 힘을 쏟았지만, 첫 교육생 20명 중 8명만 수료한 게 대표적이다. 그중 한 명도 지난달 말 퇴사했다. 게다가 간병인은 의료법상 석션(가래 흡인), 드레싱(소독) 등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 이미 다른 업무가 많은 간호사들에게 이런 일을 맡기는 것도 쉽지 않다. 강성웅(사진) 승일희망요양병원장(강남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은 “예상했던 어려움이지만 제도가 갖춰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개원을 늦출 수 없었다). 루게릭병 환자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토로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명의’로 각종 희소병 환자들의 호흡재활치료에 헌신한 강 원장은 희소근육병 환자 가족의 삶을 오롯이 지켜봤다. 어느 요양병원도 대놓고 “루게릭 환자는 받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요양을 의뢰하면서 “인공호흡기를 쓰는 환자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관리가 어렵겠다”며 거부하기 일쑤다.

 

강 원장은 “일본에는 이런 중증근육병 환자를 수용하는 전문 요양병원이 27곳 있다”며 “단순 인구수만 계산해도 우리나라에는 10곳 이상 있어야 하는데 이제 발걸음만 겨우 뗀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런 전문요양병원에서 환자 관리를 간병인이 아닌 병원 직원이 한다. 병원 수익을 바탕으로 직원들이 교육을 받고 책임지고 간병을 도맡는 식이다.

 

승일희망요양병원. 최상수 기자

일본은 요양병원 입원 시 쓸 수 있도록 정부가 환자에게 270만 엔(약 270만원)을 간병비로 지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요양병원 입원 시 정부에서 받던 장애활동지원비가 끊기는 것과 대비된다.

 

강 원장은 같은 요양병원이라도 중증전문과 경증의 경우 의료진의 처치와 간병 강도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수가 차등에 대한 필요성도 강조했다. 비단 루게릭병만의 문제가 아니라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도 간병과 요양 환경에 ‘새로운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문제점을 인지하고 지난해 말까지 두 차례 용역을 맡기는 등 개선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더딘 게 문제다. 통상 시범사업과 재정 투입 효과 평가, 본사업까지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린다.

 

승일희망요양병원. 최상수 기자

관련 연구를 수행한 권용진 서울대병원 교수는 “중증장애인의 경우 경증장애인보다 시간당 겨우 3000원 더 받다 보니 장애인 활동지원사들이 중증장애인을 기피한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보상을 좀더 높이고, 석션과 드레싱 등 일부 의료행위를 장애인 활동지원사에 허용하고, 환자가 병원에 입원해도 낮에는 활동지원사가 간병할 수 있도록 제도를 풀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 원장은 “대한민국이 1인당 국민소득에서 일본을 앞질렀다고 환호했지만,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루게릭병을 비롯한 희소질환 환자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주고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루게릭병은?

‘루게릭병’의 정식 질병명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my otrophiclateralsclerosis·ALS)이다. 1930년대 미국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루게릭이 갑작스럽게 발병 후 38세에 사망하면서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국내에서는 4700여 명이 투병 중인 것으로 추정한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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