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신화’서 보수 대선 후보로
서울대서 운동권 투신 노동운동 활약
투옥·고문 받으며 심상정 숨긴 일화도
YS 권유로 민자당 입당해 보수 전향
3선·경기도지사 연임… GTX 등 성과
극우 이미지로 확장성엔 물음표
자유통일당 거치며 ‘아스팔트 우파’로
尹정부서 경사노위장·고용 장관 맡아
국무위원 계엄 사과 요구 때 혼자 거부
“일제 때 선조 국적 일본” 발언 등 구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후보의 경선 과정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당 경선 주자 중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의 단일화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그는 ‘김덕수’라는 구호를 앞세웠다.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김 후보는 한 전 총리와 단일화 방식과 시기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에 당 지도부는 초유의 새벽 후보 교체라는 황당한 무리수를 뒀고, 이는 당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김 후보는 대선후보 자격을 되찾았다.

경선 과정만큼이나 김 후보의 삶도 극적이긴 마찬가지다. 한때 ‘노동운동의 신화’로 불렸던 그는 보수로 전향한 뒤 진보 진영에서 ‘잊혀진 계절’이 됐다. 국회의원 3선과 경기도지사 재선 이후 정치적 하락곡선을 그렸던 김 후보는 아스팔트로 향했다. 여의도에서 김 후보의 이름이 잊혀 갈 때쯤 김 후보에게 손을 내민 것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었다. 윤석열정부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 후보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윤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이라는 격랑을 거치며 거대 보수정당의 대선후보 자리에 올라섰다.
세계일보는 김 후보의 인생을 톺아보는 한편 대선후보로서의 강점(Strength)과 약점(Weakness) 그리고 기회(Opportunity)와 위기(Threat) 요인을 분석한다.

◆노동계의 신화가 된 ‘개천용’
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7남매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지역 명문 학교인 대구 경북중과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문중의 별과 다름없었다. 김 후보가 운동권에 투신하게 된 것은 한 학번 선배인 심재권 전 의원의 운동권 동아리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 신입생 모집 강연을 들은 뒤였다. 후사연 선배들과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일대에서 자취를 하며 목격한 판자촌의 삶은 그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1971년과 1974년 두 차례 제적당한 김 후보는 노동운동에 집중한다. 청계천으로 향한 김 후보는 동대문 시장에서 온종일 옷에 구멍을 내고 쇠 단추를 박는 ‘또또’를 치고 월급 1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도루코 면도날을 만드는 한일공업으로 직장을 옮긴 김 후보는 이곳에서 노조 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노동운동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을 맡았던 김 후보는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 주도 혐의로 투옥됐다. 당시 김 후보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의 위치를 숨긴 일화가 유명하다.
1988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김 후보를 맞이한 것은 이미 민주화가 이뤄진 한국 사회였다. 김 후보는 진보정당의 제도권 입성 실험에 나섰다. 이재오 전 의원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당은 제14대 총선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득표율 미달로 정당 등록이 취소돼 해체됐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대선후보로
실험에 실패한 김 후보는 1994년 보수로 전향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민주자유당(국민의힘 전신)에 입당한 것이다. 이 시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김 후보는 2006년 저서 ‘나의 길, 나의 꿈’에서 “재야에서는 나를 변절자라고 했다.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에서는 빨갱이라고 했다. 나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서 미운 오리 새끼였다”고 아프게 회상하기도 했다.
민자당에 입당한 김 후보는 경기 부천시 소사구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특히 첫 선거인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 박지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키면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에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중진 37명을 불출마시키는 ‘공천 개혁’을 단행하며 이름을 날렸다.

2006·2010년 두 차례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연임에 성공한 김 후보는 이후 단 한 번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다. 2012년 18대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완패했고, 2016년 총선에선 ‘보수의 텃밭’ 대구 수성갑에서 민주당 김부겸 후보에 밀려 패배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선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23%를 간신히 넘기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김 후보는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 탈당 이후 자유통일당, 기독자유통일당 등을 거치며 ‘아스팔트 우파’로 활동했다.
김 후보의 이름이 다시 정치권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22년부터다. 윤 전 대통령은 2022년 9월 김 후보를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발탁한 데 이어, 지난해 8월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보수층 확고하지만… 확장성은 ‘글쎄’
김 후보의 강점은 보수층의 확고한 지지다. 김 후보가 대선후보군에 포함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12월11일 국회 긴급 현안질문이 꼽힌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국무위원들이 계엄 선포를 막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며 기립 사과를 요구했다. 한 전 총리와 대부분의 국무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지만, 김 후보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김 후보는 보수층에게 민주당의 대척점으로 인식됐다. 한 전 총리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당 지도부가 후보 교체를 밀어붙였음에도 당원들의 반대로 무산된 것은 보수층의 표심을 보여주는 일화다.
경기도지사를 연임하는 동안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줬다는 점도 김 후보의 강점이다. ‘출퇴근 혁명’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는 김 후보가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던 2008년 4월 국토해양부에 건설을 건의한 것이다.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유치, 판교·광교 테크노밸리 조성 역시 김 후보의 실적이다.
김 후보의 확장성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아스팔트 우파 활동을 통해 누적된 ‘강성 보수’ 이미지가 중도 확장을 방해해 좀처럼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선 경쟁자였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19일 김 후보를 향해 “윤 전 대통령 부부 그리고 자유통일당과 극우 유튜버 등 극단세력과 과감하게 절연하는 모습을 국민께 보여드려야 한다”고 재차 촉구하기도 했다.
김 후보는 과거 발언과 역사관 논란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을 주도해 유죄가 확정된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을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가 여론이 악화하자 철회한 것이 대표적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국적은 중국”, “일제강점기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 등의 발언도 재조명되면서 논란이 됐다.

◆‘尹 탈당’은 기회, ‘빅텐트 지연’은 위협
윤 전 대통령의 탈당은 김 후보에게 기회로 평가된다. 윤 전 대통령은 17일 “제가 국민의힘을 떠나는 것은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며 국민의힘에 탈당계를 제출했다. 윤 전 대통령의 거취와 관련해 ‘자진 탈당’과 ‘출당’을 두고 국민의힘 내부 분열이 있었던 만큼, 정치권에서는 김 후보가 당내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도층 이탈의 원인 중 하나로 꼽혔던 윤 전 대통령이 탈당한 것을 계기로 지지율 반등을 꾀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반(反)이재명 빅텐트’ 구성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은 김 후보를 위협하는 요인이다. 김 후보는 당초 한 전 총리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포함한 빅텐트를 구상했지만, 한 전 총리와의 단일화 내홍 이후 무산되는 분위기다. 이재명 후보와의 지지도 격차가 여전한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연대 대상인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완주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내부 경쟁자였던 한 전 총리와 한 전 대표,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지원 사격에 소극적인 상황이다. 한 전 총리는 공동선대위원장직을 고사한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한 전 대표는 20일부터 현장 지원 유세에 나설 예정이지만 선대위 합류에는 선을 긋고 있다. 홍 전 시장은 경선 탈락 후 국민의힘을 탈당한 데 이어 연일 당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놓다가 돌연 미국 하와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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