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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0 만학도들 “영어 까막눈 한풀어”… 딸뻘 스승에게 바친 카네이션

입력 : 2025-05-15 19:11:18 수정 : 2025-05-15 2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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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여고 ‘감동의 스승의날’

4080 만학도들 ‘감사의 눈물’
“선생님 격려에 5시간씩 통학”
43명 제자들 박수·편지 읽자
“제가 배워” 30대 스승도 울음

15일 정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일성여자고등학교 1학년 1반 교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나와 칠판 한쪽에 분필로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글귀를 썼다.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꽃과 구름을 그리고, 하트를 그려 넣는 모습은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교실은 특별하다. 책상 위에는 약봉투가 놓여 있다. “오이를 먹어야 소화가 잘된다”, “점심 약 먹을 시간”이라는 대화도 오갔다. 필기구 옆에는 돋보기가 있다. 이 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고령이기 때문이다. 일성여중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40대에서 80대까지의 만학도들이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학력 인정 평생학교다.

 

15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고등학교 1학년 1반에서 유기례(83) 학생이 나경화(39) 담임 교사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있다.

“44회 스승의날을 맞아 사은의 날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급장이 행사 시작을 알리자 떠들썩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곧이어 학생들의 박수 속에 나경화(39) 담임 교사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43명의 만학도가 교훈 ‘진실, 근면, 검소’를 함께 낭독한 후, 손정화(80)씨가 감사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손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배움에 설레어 교문에 들어선 게 엊그제 같은데 꿈 많은 학생이 됐다”며 “나이 탓에 방금 들은 것도 금방 잊어버리고, 제대로 수업을 이해하기도 힘든데 항상 반복해서 설명해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여러 학생도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였고, 나 교사도 끝내 눈물을 훔쳤다.

 

나 교사는 “학교에 와서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배우는 게 더 많다”며 “늦은 나이까지 배움의 열정을 간직하신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삶의 태도를 많이 배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반 학생 유기례(83)씨는 “담임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치는데, 정말 고맙다”며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래도 여기 와서 뭘 좀 들었다고 abc들은 알게 됐다”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유씨는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나 남성 중심의 교육 분위기 탓에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30여년 전 시장에서 일하던 유씨는 우연히 들은 ‘무식하다’는 한마디에 검정고시 학원으로 향했다. 그 후로 꾸준히 배움의 길을 걸어온 유씨는 마침내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됐다.

 

경기 남양주에서 매일 왕복 5시간이 걸려 학교를 오가는 고된 여정이지만, 유씨는 배움의 즐거움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유씨는 “선생님이 전화로 격려도 해주시고, 학교에 안 나올 수가 없다”며 “제자로서 우리가 뭐길래 선생님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머릿속에 넣어주려고 수고를 하시는가, 그 마음에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맙다”라고 말했다.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는 옆반 장주선(73)씨도 고령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했다. 장씨는 “노인분들에게 이렇게 맞춰주면서 한다는 게, 공부 가르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인간적으로 너무 고마운 부분”이라고 힘줘 말했다. 장씨는 특히 정보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담임 선생님께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이예림 기자 yea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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