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게 위로하거나 아는 체 말길
연초록 찬란한 5월의 햇살보다
그늘서 말려야 할 마음 있기에
오엑스로 판단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면 좋겠다. 불쑥 나타나 친근한 척 손을 내미는 사람이 불편하다. 그는 나를 속일 것 같다. 반갑다며 누가 등을 툭 쳐도 호흡이 멎을 듯 놀란다. 질문을 던지면 도망치고 싶다. 그들의 호기심 혹은 관심이 선의로 느껴지지 않는다. 톡톡 보내오는 문자들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안부 묻는답시고 밤에 전화하는 사람을 차단하고 싶다. “요즘 통 안 보여서 걱정이 되어서요.” “아무리 그래도 밤 10시 넘어 전화하시다뇨.” 나는 무례한 인간이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의 아티스트라고 믿는 게 역겹다.
그렇다. 나는 불안 장애를 겪고 있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잠을 잘 자지 못하고 꿈속에서도 끔찍한 일에 맞닥뜨린다. “당신도 그렇군요. 저도 그래요.”라는 말조차 듣기 힘겨울 땐 그나마 책을 펼치는 게 낫다. 활자가 빽빽한 책보다는 여백이 많은 시집이 낫다. 며칠 만에 햇볕 쐴 겸 골방에서 나와 근린공원에 왔다. 벌써 보라색 꽃잎 떨어지는 등나무 아래 앉았다.

정다연의 시집 ‘햇볕에 말리면 가벼워진다’에 실려 있는 ‘친애하는 나의 불안’이라는 작품이다. 이 시집은 청소년시집으로 분류되는데 굳이 시집, 청소년시집 등으로 나누는 게 우습다. 나는 종종 동시도 읽는데 내 내면에 웅크린 어린이가 좋아한다. 나의 불안을 ‘아기 고양이’나 ‘부드러운 스웨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괜찮아질까, 조금은 견딜 만해질까? 불안 장애나 우울감을 마음의 감기로 받아들이라는 의사의 말보다는 부드러운 스웨터로 표현하는 시인의 말이 위로를 준다. 불안의 실뭉치를 잘 다루면 총천연색 스웨터가 될 것 같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흰 눈송이를 사랑하고 부드럽게 닳은 스웨터 입고 손을 호호 불며 시 쓰는 밤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5월. 내가 세상에 태어난 달. 단 한 번도 5월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없네. 11월, 12월을 제목으로 시를 썼고 ‘날마다 설날’이란 시도 썼지만, 이토록 연초록으로 찬란한 계절을 노래한 적 없네. 삶이 잔인하고 칙칙하기에 작품은 환하게 쓴다고 말한 작가가 누구였더라? 나도 언어의 체질을 바꾸고 싶다. 아까부터 드러난 신체가 가렵다. 햇빛 알레르기가 없더라도 빛나지 않아도 그늘에 말려야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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