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젊은이 목소리 반영” 보수 혁신 강조
호주의 제1야당이자 보수 정당인 자유당에서 창당 8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당대표가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같은 강경 보수파와는 결이 다른 중도 우파로 분류되는 수잔 레이(63) 자유당 의원이 주인공이다.

13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지난 3일 하원의원 총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노동당에 참패한 자유당은 이날 당내 경선에서 온건파인 레이 의원이 앵거스 테일러 의원을 4표 차이로 누르고 새 대표가 되었다. 경선을 앞두고 테일러 의원은 “보수적 가치를 회복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트럼프와 비슷한 강경 우파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레이 의원은 “여성과 젊은이를 비롯해 수많은 호주인들이 그간 자유당에 소외감을 느껴 왔다”며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자유당은 현대 호주를 존중하고, 현대 호주를 반영하며, 현대 호주를 대표해야 한다”는 말로 보수의 혁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은 전체 150석 중 과반(76석 이상)이 훨씬 넘는 93석을 획득하며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 반면 자유당이 주도하는 보수 연합은 고작 41석에 그쳤다. 제1야당 자리는 가까스로 유지했으나 과거 노동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양대 정당이었던 자유당은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

진보 성향의 노동당은 지난 2월까지만 해도 자유당이 주도하는 보수 연합에 지지율이 뒤처졌다. 그런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호주의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10% 상호 관세까지 예고하면서 판세가 바뀌었다. 유권자들 사이에 반미(反美) 정서가 확산하며 그간 트럼프를 따라하는 데 급급했던 보수 정당들이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이다. 선거가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외신은 앞다퉈 “트럼프가 캐나다에 이어 호주 총선 결과도 뒤흔들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앞서 지난 4월 치러진 캐나다 총선에서도 참패가 예상됐던 진보 정당이 유권자들의 반미 감정에 힘입어 보수 정당을 제압하고 원내 1당으로 등극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출범한 자유당은 호주를 대표하는 보수 정당이다. 그간 로버트 멘지스, 존 하워드, 토니 애벗, 스콧 모리슨 등 총리를 배출하며 호주 정치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번에 여성으로는 처음 자유당을 이끌게 된 레이 대표의 경우 2001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내디딘 이래 역대 자유당 내각에서 노인부 장관, 체육부 장관, 보건부 장관, 환경부 장관 등을 맡아 차근차근 국정 경험을 쌓아왔다. 1961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10살 때 호주로 이주한 레이 대표는 정치인이 되기 전 민항기 조종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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