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로가 5월 공연 무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스웨덴에서 온 세계적 안무가는 볼레로에서 영감을 받은 대표작을 국내에 선보이고 국립국악원에선 우리 악기로 연주한 볼레로를 공개했다. 영화가에선 볼레로 작곡 과정을 담은 예술영화가 흥행 분투 중이다. 국내 오케스트라 두 곳도 볼레로를 연주할 예정이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원래 볼레로는 18세기 후반 스페인에서 생겨난 4분의 3박자 느린 무용음악이자 전통춤. 기타와 캐스터네츠 반주에 맞춰 독무 또는 2인무로 추는데 우아한 동작과 서정적 선율이 특징이다. 클래식 음악으로 유명한 볼레로는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 작품이다. 1928년 가을 라벨은 당시 발레 프로듀서였던 이다 루빈스타인 의뢰로 새로운 무용음악을 구상하던 중 스페인 풍의 볼레로 리듬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 결과 단 하나의 선율과 리듬 동기가 15분 전후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무후무한 구성으로 라벨의 볼레로가 완성됐다.

작게 울리는 스네어 드럼의 고동처럼 반복되는 리듬 위로 두 개의 선율이 교대로 등장해 변주 없이 반복된다. 플루트로 시작해서 계속 악기가 추가되다 마침내 전체 오케스트라가 모두 합류하고 강렬한 포르티시모에 도달한 마지막 음절에서 곡은 갑작스럽게 종결된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볼레로 : 불멸의 선율’은 라벨이 창작의 영감을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과 뮤즈였던 인물들을 떠올리는 여정을 따라간다.

대중에게 볼레로를 깊이 각인시킨 건 프랑스 거장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대서사시. 프랑스·독일·옛 소련·미국 등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이 파리 에펠탑 앞에서 펼쳐지는 자선공연 무대에 모여 볼레로를 공연하는 피날레가 압도적이다. 전설적인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를 역시 전설적인 무용수 죠르주 돈이 선보이며 카라얀, 누레예프, 에디트 피아프 등 실존 인물을 연상시키는 굴곡진 모든 인물 서사가 하나로 수렴된다. 영화평론가 정영일(1928-1988)이 “20세기 인류 문화의 정수를 불과 몇분 안 되는 시간에 보여줄 수 있었던 대단한 장면”이라고 극찬한 장면이다.

◆요한 잉거·김용걸·김보람·전민철의 볼레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선 세계적 안무가 요한 잉거가 볼레로에서 받은 영감으로 만든 대표작 ‘워킹 매드’를 18일까지 서울시발레단을 통해 선보인다. 잉거는 볼레로를 지휘하는 한 유명 지휘자 모습이 점점 광기에 가까워지는 옛날 TV영상을 보고 이 작품을 만들었다. 7일 국내 언론과 만나 잉거는 “25년 전 젊은 안무가였을 때 작품”이라며 “이 매우 유명한 음악을 내 목소리와 비전으로 마주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종종 볼레로는 에로틱한 이미지로 표현되는데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창조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이 저의 도전이었다”고 설명했다.
작품 초반, 플루트가 잔잔히 메인 선율을 연주할 때 무용수들은 코믹한 몸짓으로 등장하지만, 반복되는 선율이 점차 거세질수록 그 움직임에도 광기가 서려가기 시작한다. 볼레로의 리듬이 고조될 때마다 무용수들은 모자를 집어던지거나 무대에 설치된 커다란 나무 울타리 벽에 몸을 부딪치는 등 파격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데, 이러한 연출을 통해 안무가는 인간 내면의 억눌린 욕망과 혼돈을 표출한다. 잉거는 “벽은 또 다른 요소이자 또 다른 무용수”라며 “볼레로가 다소 단조로울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황을 창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잉거처럼 볼레로는 많은 무용가에게 영감을 주는 ‘꿈의 곡’으로 누구나 자신만의 춤을 만들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국립현대무용단이 파격적인 기획 공연 ‘쓰리 볼레로’로 호평받은 바 있다. 김용걸, 김설진, 김보람 등 서로 개성이 뚜렷한 안무가 3인이 각각 자신만의 해석으로 라벨의 볼레로를 재창작한 무대였다. 김보람은 볼레로 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철저히 분해해 재조립함으로써 원곡을 해체적 시각에서 재구성했고, 김설진 안무가는 자연의 소리와 일상의 소음을 결합해 새로운 볼레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실험을 했다. 김용걸은 대규모 군무를 활용해 원곡 볼레로의 압도적 스케일을 구현함으로써 볼레로가 지닌 집단 에너지와 카리스마를 표현했다. 공연 전회 매진으로 이듬해 앙코르 공연까지 끌어냈다.
지난해 말에는 무용계 샛별 전민철이 김용걸 안무가와 협업하여 볼레로를 선보였다. 유튜브로 널리 퍼진 이 무대에서 전민철은 원주시립교향악단의 실황 연주에 맞춰 15분간 혼신의 에너지를 불사르며 볼레로를 소화해냈다. 김용걸은 “이 볼레로 작품의 30~40%는 전민철의 안무라 해도 될 만큼 그와 함께 만들어냈다”며 제자이기도 한 전민철 재능을 극찬하기도 했다.
◆국악과 만난 볼레로
클래식 명곡을 국악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온 국립국악원은 최근 공개한 ‘생활음악 시리즈 26집’ 마지막 곡으로 국악관현악판 볼레로를 선보였다. 영화·무대음악에서 활약해온 이지수 작곡가 편곡을 맡았다. 처음 시작하는 작은 북 장단에 장구와 꽹과리가 가세하여 한국적 리듬의 반복성을 부각시키고, 해금·대금 등의 관악기가 차례로 주제를 연주하면서 서서히 음량을 키워간다.
태평소와 대피리 등 국악 관악기의 확대된 음향으로 클라이맥스의 폭발력을 표현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지수 작곡가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볼레로는 겉보기엔 단순하고 반복적인 곡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정말 정교하게 짜인 내성(內聲)과 음의 선택이 숨어 있었다”며 “그냥 듣기로는 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 악보를 분석해보니 라벨의 음악적 천재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직접 들어보면 피리와 태평소는 원곡의 색소폰 음색을 대체하며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소금과 대금은 청아하고 맑은소리로 곡의 서정성을 더했다. 이러한 악기 배치는 원곡에서 강조되는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국악 특유의 투명하고 깊이 있는 소리로 변환시켰다. “피리가 색소폰과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악의 표현력이 돋보였습니다. 소금, 대금은 청아하고 맑은 느낌을 잘 표현했고, 피리와 태평소는 약간의 우울하고 감성적인 느낌을 살렸어요. 국악기로 연주할 때 이 곡이 주는 낯선 감각은 굉장히 독특했습니다.”
경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14일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신임 상임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 취임 연주회에서 볼레로를 연주한다. 페뤼숑은 “볼레로는 각 악기가 솔로와 조합을 통해 빛나는 기회를 가지는 곡”이라고 선곡 이유를 설명했다. 23일에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상임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 지휘로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볼레로를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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