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를 이끌 새 교황이 탄생했다. 133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은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 이틀째인 8일(현지시간) 네 번째 투표 만에 제267대 교황으로 미국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을 선출했다. 교황 즉위명은 ‘레오 14세’로,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란 뜻이다. 새 교황이 이 이름을 택한 것은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리에 헌신한 레오 13세를 기려 가톨릭의 사회 참여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1955년생으로 미 시카고 태생인 레오 14세 교황은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일원이다.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직접 추기경으로 임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출신 교황이 나온 것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이다. 세속적 영향력이 큰 미국에 종교 권력까지 쥐여줘서는 안 된다는 가톨릭계의 금기가 깨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페루 빈민가에서 20년간 사목활동을 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의 중도 성향도 많은 지지를 받은 배경이다. 레오 14세는 추기경 시절 사제 독신제나 동성 커플 축복 같은 교회 내 대립각이 첨예한 문제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힌 적이 거의 없다. 보수와 개혁으로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묶을 적임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이민정책에 대해 “JD 밴스(미 부통령)가 틀렸다. 예수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 등급을 매기라고 하지 않는다”며 비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미국인 추기경 가운데 가장 덜 미국적이면서도 ‘트럼프 시대’ 혼돈을 조율할 것으로 기대된다.
레오 14세는 새 교황에 선출된 뒤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강복의 발코니에 나와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La pace sia con tutti voi)이라며 이탈리아어로 첫인사를 건넸다. 그는 전임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을 여러 번 인용하며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평화와 연대의 정신으로 함께 걸어가자”고 했다. 새 교황이 열어갈 시대가 따뜻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전 세계인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국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환영과 축복 성명을 발표한 배경도 다를 리 없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선 평화가 위협받고 전쟁의 포연이 자욱하다. 전쟁의 참화로 인간의 가치가 상실돼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들을 보듬는 교황의 중재 권능이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2027년 서울에서 개최 예정인 세계청년대회(WYD)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의 방한은 네 번째가 된다. 앞서 1984년과 1989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했고,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국내 신도들을 만났다. 선종한 전임 교황은 평생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했고, 2014년 방한 당시 줄곧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레오 14세 교황이 전임 교황의 소망을 이어받아 북한을 방문할지도 관심사다. 방북이 성사된다면 북미 관계는 물론 남북관계 개선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에도 교황의 따듯한 관심과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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