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매력·시민사회 힘 강조
각국 외교·안보 정책에 큰 영향
한국 대중문화 성공 등에 고평가

군사·경제력 등 물리적 힘을 뜻하는 ‘하드 파워’와 구별되는 ‘소프트 파워’의 개념을 정립한 국제정치학계의 거목이자 학문적 성과를 미국의 정책 현장에서 발휘했던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명예석좌교수가 지난 6일(현지시간) 세상을 떴다. 향년 88세.
고인이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간 학장을 지냈던 하버드 케네디스쿨(HKS)은 7일 홈페이지를 통해 “국제관계에서 권력의 본질에 대한 개념으로 여러 세대의 정책 입안자와 학자,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사상가 중 한 명인 나이 교수가 별세했다”고 전했다.
1937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4년 하버드대 교수진에 합류해 60여년간 후학들을 양성했다. 1970년대 다국적기업과 초국가적 사회운동, 국제기구 등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해 국제정치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실태를 연구해 상호의존 이론의 틀을 닦았으며, 이는 로버트 케오한 프린스턴대 교수와 함께 연구한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이어졌다.
소프트 파워 이론 정립은 고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상호의존적 네트워크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세계화 시대에 군사력이나 경제제재 등 하드 파워만으로 미국을 지탱할 수 없으며, 문화적 매력과 시민사회의 힘 같은 소프트 파워를 통해 상대의 자발적 동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잘 혼합해 활용하는 ‘스마트 파워’를 주창했으며, 이 같은 이론들은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정책에도 큰 영향을 줬다.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기고, 논평 활동을 한 고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그린란드와 파나마운하를 향한 야심을 드러내고 미 국제개발처(USAID)를 사실상 폐지해 소프트 파워를 약화시킨 것을 두고 “이건 ‘미국 우선’(America first)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 외톨이’(America alone)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달 별세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부장관과 함께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발간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제시했다.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 등 동맹을 중시했으며, 한국이 활기찬 민주주의 정치, 코로나19 대응, 대중문화의 성공 등으로 획득한 소프트 파워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CFR) 주최 대담에서는 “우리가 억지력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우리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라며 “중국에게 러시아와 북한이 있다면 미국은 유럽과 호주, 일본, 한국이라는 동맹이 있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상아탑 안에만 갇힌 것이 아니라 지미 카터 행정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관련 공직을 맡으며 자신의 이론을 정책에 접목했다. HKS 초대 학장이자 고인의 평생 친구인 그레이엄 앨리슨은 “나이 교수는 전쟁과 평화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정책적 지식을 발전시키는 데 열정을 쏟았다”며 “이를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부에서 실천적으로 적용하면서 핵전쟁을 방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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