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상하고 아쉽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내가 좀 더 매력적인 선수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이제는 다 지나간 과거고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솔직히 저는 아직 제가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는 사실이 와 닿지는 않아요. 그래도 받아들여야 해요. 제가 결정한 거니까. 그래서 이제는 그 누구 탓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현역 은퇴를 하긴 했지만, 배구계 자체를 ‘다시 안 볼거야’ 이런 마음은 아니니까요. 잘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는 배구를 위해, 한 번 더 선수로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최고점을 찍기 위해 긴 고민 끝에 원 소속구단 정관장에 제안한 사인 앤드 트레이드, 결렬, 현역 은퇴. 1992년생으로 아직 한창인 30대 초반의 나이에 15년을 뛴 프로배구 코트를 떠나게 된 표승주.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배구 코트를 떠났다는 사실보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출처가 불분명한, 자신이 전혀 입 밖에도 꺼내본 적 없는 말들이었다.
표승주는 “저의 은퇴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가장 속상한 게...제가 은퇴하는 이유에 대해 ‘출산’, ‘임신’ 같은, 제가 전혀 하지 않았던 말들이 흘러나오는 거였어요. 남편에게도 ‘난 어차피 그만뒀고, 다시 되돌아갈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길이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인데, 왜 자꾸 하지 않은 얘기가 기사화된 게 너무 속상해’라고 얘기했죠. 이후에도 그런 말들이 제겐 다 상처로 다가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이어 “‘가족과 가까운 곳에서 뛰고 싶다’라고 얘기한 적은 있지만, 이는 표면상의 명분이었어요. 임신 얘기는 절대 한 적이 없었어요. 분명한 건 저는 배구를 더 하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바랐던 것은 ‘좀 더 다른 환경에서 뛰어보고 싶다’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표승주의 곁에는 때로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기도 했고, 태극마크를 달고서는 한국 배구를 드높이겠다는 마음 하나로 뛰었던 동료, 선후배들이 있었다. 표승주는 “협상 마감 전에 제가 처한 상황을 얘기하니 열이면 열 모두 ‘안 된다. 관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더 해야한다, 후회하지 않겠냐’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도 제 마음이 워낙 확고했으니 더 하라고 얘기는 못 하더라고요”라고 지난 일을 회상했다.

그리고 가장 의지하는 선배이자 언니, 2020 도쿄 올림픽 때 룸메이트 사이였던 ‘배구여제’ 김연경도 큰 힘이 됐다. 김연경은 표승주의 FA 미계약, 그리고 은퇴 소식이 전해지자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조금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배구를 더 할 수 있었을텐데...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더욱 더 선수들을 위한 제도가 생기길 바라봅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번 소식이 전해지기 전 표승주는 김연경에게 연락해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그는 “(연경)언니가 ‘절대 안 된다. 그냥 더 해라’라고 얘기하셔서 ‘저는 이제 안 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니 언니가 ‘정말 괜찮겠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언니가 인스타그램에 메시지를 올렸고, 그걸 보는 데 마음이 찢어지더라고요. 쉽지 않은 일인데...선수 편에서 그렇게 해준다는 게. 그 자체가 너무 고마웠어요”라고 후일담을 전해줬다.
표승주는 이제 더 이상, 아니 최소 1년은 V리그에서 뛸 수 없다. 물론 실업팀에 입단해 1년 간 실전 감각을 최대한 유지하고 몸 관리를 하면서 다시 V리그 무대를 노크할 수는 있지만, 그때도 여전히 현재 보상 규정인 전 시즌 연봉의 200%+보상선수 1명 혹은 전 시즌 연봉의 300%를 적용받아야 한다. 한창 프로에서 뛰고 시장에 나온 지금도 그 허들을 넘지 못했는데, 1년을 V리그에서 떠나 있다가 다시 선택을 받기란 더 어려울 게 자명하다. 표승주는 “제가 만약 1년 뒤를 바라보고 다시 배구 선수의 끈을 놓지 않았다가 1년 뒤에 또 다시 이런 상황을 겪게 된다면...저는 그땐 정말 지금보다도 더 힘들 것 같아요. 그게 겁나서 그 길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라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FA 제도와 보상 규정 완화로 흘렀다. 표승주는 “제가 프로에 15년 있으면서 선수를 위한 방향으로 FA 제도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라면서 “제가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조금은 무거운 FA 제도, 보상 관련 규정들이 이번 계기로 바뀌었으면 해요. 더 이상 저 같은 상황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게요”라고 힘줘 말했다.
표승주 말대로 프로배구의 FA 제도는 보완이 필요하다. 선수들의 몸값은 예전에 비해 크게 올랐지만, A,B,C 등급을 가르는 기준인 연봉 금액은 여전히 그대로다. 여자부의 경우 1억원만 넘으면 모두 A등급을 받는다. 게다가 20대 중반에 맞이하는 첫 FA와 30대 중반에 얻는 세네 번째 FA의 보상 규정이 동일한 것도 베테랑 선수들의 FA 이적에는 큰 걸림돌이 된다. 표승주도 이번이 네 번째 FA였다.
프로농구(KBL)의 경우에는 전체 보수 서열로 보상 체계가 존재한다. 여기에 보상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 규정(전 소속 구단에서 해당 FA 선수와 재계약을 포기한 경우, 만 35세 이상 선수, 계약 미체결 선수가 이적한 경우 등)를 두고 있다. 프로야구는 선수 본인이 FA 자격을 행사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직전 시즌 성적이 부진했거나 혹은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할 경우 선수 본인이 스스로 ‘FA 재수’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배구는 자동적으로 FA 자격이 부여된다. 선수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FA 미아가 될 위험도 존재한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그 2주 동안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어쨌든 은퇴라는 마지막 선택은 본인의 의사였다. 이제 표승주는 공식적으로 ‘백수’가 됐다. 아직 향후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표승주는 “지금은 무언가를 하겠다는 계획보다는 그때그때 맞춰 살아보려고 해요. 몇 달 정도 푹 쉬면서 여태 하고 싶었던 게 뭘까를 찾아보려고 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배구만 해왔거든요. 아직은 백수라는 사실이 와 닿지 않지만.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일상들, 예를 들면 겨울에 혹시나 탈이 날까 싶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던 굴 요리를 먹는다던가, 항상 시즌 중이었어서 경기를 하거나 훈련을 해야했던 설날을 가족과 보내는 그런 것들도 이젠 할 수 있겠죠”라며 웃었다.

엘리트 배구 선수로서 표승주의 여정은 이제 끝났지만, 배구는 여전히 표승주의 인생 곁에 있을 예정이다. 그는 “언젠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유소년 꿈나무들을 가르쳐보고 싶어요. 프로에 오는 후배들 보면 공격은 상대에게 읽히기 전에 잘 하는 경우는 많은데, 리시브나 수비는 항상 아쉽거든요. 저도 학창 시절엔 아포짓으로 뛰면서 공격만 하다 프로에 와서 리시브를 시작한 케이스라, 어린 친구들에겐 수비나 리시브 등 기본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선수 표승주를 응원해준 팬들에게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래도 배구를 좋아해주시는 분들께 ‘그래도 쟤 참 열심히 했어. 성실했어’ 그걸 남겼으면 전 됐어요. 주변 팬 분들께 DM도 많이 받았는데, 답장은 일일이 못 했지만, 그걸 보면서 ‘아,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고, 선수였구나’를 느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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