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잠수사 다룬 ‘바다호랑이’ 등
중견 감독들 신작 잇따라 베일 벗어
배우 이희준·이정현, 연출 작품 선봬
박찬욱·배창호 감독 등 관객과 소통도
알찬 프로그램 구성… 극장 가득 메워
지난달 30일 개막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다. 전년보다 줄어든 예산으로 영화제는 허리띠를 조인 채 치러졌고 해외 스타 감독·배우 내한도 줄었지만 의미 있는 프로그램들로 내실을 기했다.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매는 관객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극장을 가득 메웠다.

◆박찬욱 토크부터 정윤철·이희준 신작까지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된 배우 이정현은 영화제 초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3일 이정현의 선정작인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과 단편 ‘파란만장’(2011·박찬경 공동연출) 상영 이후 이정현과 박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 관객과의 대화(GV)가 열렸다. 박 감독은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로 이어지는 ‘복수 3부작’의 첫 작품 ‘복수는 나의 것’을 두고 “3부작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지는 않았다”며 비화를 전했다. 그는 “(‘올드보이’에 대해) 당시 기자들이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에 실패했는데 왜 또 복수극을 하냐고 빈정대 심통이 나서 3부작의 계획이 있다고 말해버렸다”며 “그 말을 책임지느라고 어렵게 ‘친절한 금자씨’까지 만들게 된 것”이라고 했다. ‘파란만장’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만든 영화·시리즈 모두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고 자부심 있는 작품”이라며 “이 영화를 여러분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 소개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이정현은 “영화계에서 잊혔던 내가 (영화의 길로) 돌아가게 해준 고맙고 소중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중견 감독들의 신작도 공개됐다. ‘말아톤’(2005), ‘좋지 아니한가’(2007), ‘대립군’(2017)의 정윤철 감독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시신 수습에 앞장선 고(故) 김관홍 잠수사를 모티프로 한 경수(이지훈) 이야기를 전면에 다룬 ‘바다호랑이’를 선보였다. 트라우마로 경수의 삶이 망가지는 모습과 해경이 구조 작업 당시 발생한 민간 잠수사 사망의 책임을 물어 현장을 이끈 고참 잠수사를 고소해 벌어지는 법정 공방이 영화에 담겼다. 2일 상영에서 관객석 곳곳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고 상영이 끝난 후엔 긴 박수가 나왔다. 정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는 오후 11시쯤에야 시작했지만 대부분 관객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영화는 상당 분량을 연극 연습실 안에서 최소한의 소품을 가지고 실험적으로 촬영됐다. 정 감독은 “(단편 영화 찍는 시간인) 7∼8회차 만에 전체 분량을 찍었다”며 “자본 문제 때문에 선택한 방식이지만, 이 형식이 가진 장점도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연출 도전작도 여럿 공개됐다. 배우 이희준의 ‘직사각형, 삼각형’은 가족 모임에서 싸움이 발생하고 언성이 높아져가며 벌어지는 야단법석을 그린 진선규 주연의 코미디. 2018년 단편 ‘병훈의 하루’ 이후 이희준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1일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는 “관객석이 가득 찬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며 벅찬 마음을 드러냈다. 배우 이정현은 연출 데뷔작인 단편 ‘꽃놀이 간다’를 선보였고, 배우 류현경은 첫 장편 연출작 ‘고백하지 마’로 초청됐다.

◆8090년대 간판 배창호·장선우 재조명
1980∼199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두 감독은 영화제를 통해 오랜만에 관객을 만났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해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긴 배창호의 영화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렸다. 배 감독이 만든 장편 16편을 집약한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 업’(박장춘·배창호 감독)도 첫선을 보였다. 동해안·설악산·제주·서울 등 국내 로케이션과 ‘깊고 푸른 밤’(1985)을 찍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흑수선’(2001)을 찍은 일본 마쓰야마까지 배창호 영화 속 공간을 탐방하며 그의 내레이션으로 영화 인생을 되짚는 일종의 영상 에세이다. 배 감독은 전체 연출작 18편 중 무려 13편에서 호흡을 맞춘 페르소나 격 배우 안성기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드러냈다. 배 감독은 3일 “(‘배창호의 클로즈 업’이) 사실은 ‘안성기의 클로즈 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영화에 그의 클로즈 업이 많이 담겼다”며 “그가 (건강 문제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마장 가는 길’(1991),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등의 장선우 감독은 수 년 만에 영화계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이 실패하고 2005년 몽골서 촬영하던 영화마저 엎어진 후 영화계를 떠난 그는 이정현의 초대로 ‘꽃잎’(1996)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영화제에 참석했다. 관객들과 함께 객석에서 ‘꽃잎’을 관람한 그는 “이 영화를 거진 30년 만에 보며 너무 슬퍼서 처음으로 내 영화를 보다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가족을 잃고 정신이 나간 채 떠도는 소녀(이정현)를 중심으로 광주의 폭력과 비극을 그렸다. 그는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못할 짓 많이 시켰구나 하는 반성과 후회가 든다. 특히 이정현 배우에게 어떻게 이런 모진 연기를 시켰지 하는 반성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광주의 폭력이 끝났다 해도 우리 사회에 내재한 폭력성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가장 연약한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전주영화제는 열흘 간의 항해를 9일 끝마친다. 폐막작은 네팔 이주 노동자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기계의 나라에서’(김옥영 감독)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