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은퇴할 선수가 아니다. 1992년생으로 3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체력이나 기량은 건재하다. 아니 최고 수준의 선수 중 하나다. 전술에 따라 리시브와 수비 등 궂은일을 도맡기도 하고, 공격적인 역할을 맡으면 한 시즌에 500점 이상을 해줄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런데도 프로 선수 생활 15년의 결말은 FA 미계약에 따른 은퇴다. 너무나 아깝다. 2025 KOVO 여자부 FA 시장에서 어느 구단과도 계약을 맺지 못해 최소 한 시즌을 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 표승주 얘기다.
2025 KOVO 여자부 FA 시장의 가장 큰 뉴스는 ‘최대어’로 꼽혔던 이다현이 현대건설에서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게 아니다. 베테랑 아웃사이드 히터 표승주가 FA 대상자 14명 중 유일하게 미계약자 신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이다.
KOVO 규정에 따르면 FA 미계약자가 되면 최소 향후 한 시즌은 뛸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표승주는 지난 24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 말을 어떻게 꺼낼까 몇 번을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글을 남긴다”면서 “15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다른 구단의 오퍼도 오지 않았고, 원소속 구단과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깊은 고민 끝에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은퇴를 선언했다.


표승주는 이어 “선수 생활을 하면서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남편, 좋아하는 언니, 친구, 동생들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거 같다”면서 “응원해주신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정관장에서 뛴 2024~2025시즌에 생애 첫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표승주는 “누구보다 간절했고, 또 후회 없이 뜨겁게 싸웠다”면서 “그 순간이 정말 선수로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고 되돌아봤다.
다른 구단의 오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 협상 초기엔 표승주가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협상 기간이 길어지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다. 보상금과 보상 선수가 발생하는 FA 영입보다는 사인 앤드 트레이드가 현실적인 방안으로 거론됐다.


정관장의 협상 대상팀은 김연경의 은퇴로 아웃사이드 히터가 필요했던 흥국생명. 그러나 두 팀은 챔피언결정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프런트 간의 갈등이 있었다. 홈에서 치러진 1,2차전을 모두 잡고 대전으로 내려간 흥국생명은 3,4차전 승리 시 우승이었기에 세리머니를 위한 통천 등을 정관장 홈인 대전 충무체육관에 설치하려고 했으나 정관장 프런트가 이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두 팀 프런트 사정 때문에 협상 테이블이 쉽사리 차려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표승주를 보내는 대신 요구한 선수가 흥국생명의 핵심 선수였다.
내부 FA 자원을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또 다른 팀이 흥국생명에 트레이드 얘기를 꺼내자 “정관장에 삼각 트레이드를 제안해달라”고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누적되면서 결국 표승주는 FA 계약을 맺지 못하고 미계약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표승주는 2010~2011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은 뒤 2014~2015시즌을 앞두고 도로공사가 정대영을 FA 영입하면서 보상 선수로 GS칼텍스로 이적했다. GS칼텍스 이적 이후 본격적으로 아웃사이드 히터로 전향한 표승주는 공수겸장의 선수로 거듭났다. 2016년 첫 FA 때는 GS칼텍스에 잔류했고, 2019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어 IBK기업은행으로 이적했고, 2022년 세 번째 FA 자격을 얻은 뒤엔 IBK기업은행에 잔류했다. 보유한 기량은 물론 좀처럼 부상을 당하지 않는 자기 관리 능력이 있었지만, 유독 FA 시장에서는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표승주는 네 번째 FA를 한 시즌 남겨두고 이소영의 보상선수로 정관장으로 이적하게 됐다.

메가와 부키리치라는 ‘쌍포’를 보유한 정관장에서 표승주는 자신의 공격본능을 최대한 봉인하고 수비와 리시브에서 제몫을 다했다. 이 때문에 FA를 앞두고 기록에서 큰 손해를 보는 상황이 생겼지만, 표승주는 팀 승리만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런 희생의 결과가 FA 미계약에 따른 은퇴였던 셈이다.
표승주의 은퇴로 인해 FA 제도 전반을 손을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연경도 자신의 SNS를 통해 “조금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배구를 더 할 수 있었을텐데...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더욱 더 선수들을 위한 제도가 생기길 바라봅니다”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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