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근당고촌재단 이사장으로 34년간 장학 사업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제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을 겨냥한 사퇴 권유에 동참한 김두현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고인은 192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 조선변호사시험(2회)에 합격한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육군 법무관으로 입대했다. 중령을 끝으로 전역한 뒤에는 법관으로 임용돼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대구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967년 법원에 사표를 내고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고향인 충남 당진 지역구에서 여당인 공화당 후보로서 금배지를 단 것이다.

지난 2014년 법률 전문지 ‘법조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갑작스러운 정계 입문에 대해 “그때 대법원장이 1년만 대구에 있으면 서울로 다시 불러주겠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여건상 고향인 당진에서의 출마를 뿌리칠 수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국회의원으로서 고인은 전공 분야인 법률을 다루는 법사위 대신 재정경제위에서 주로 활동했다. 다만 1971년 8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 후보에게 져 낙선하며 4년 만에 의정 활동을 접었기에 정치인으로서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
정계를 떠나 법조계로 돌아온 고인은 서울에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변호사 등록 직후인 1971년 대한변협 부회장이 된 데 이어 1977년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뽑혔고 1981년 변협 회장에 올랐다. 재야 법조계 수장이 된 고인의 취임 일성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것이었다. 변협 회장으로서 그는 임기 내내 국선변호 제도의 개선과 법률구조 사업 활성화에 애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이 변협 회장을 그만둔 뒤인 1985년 5월 사법부에서 법관 인사 파동이 불거졌다. 5공 정권에서 임명된 유태흥 당시 대법원장이 시국 사건에 연루된 대학생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수도권 법원 판사를 지방으로 내보낸 데 이어 이 같은 인사의 부당함을 지적한 동료 법관에게도 좌천성 전보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변협은 임시 이사회를 열고 유 대법원장의 판사 인사권 남용을 규탄했다. 이어 유 대법원장에게 책임지고 스스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한국법학원장으로 일하던 고인은 변협 자문위원 자격으로 해당 건의문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이 사건은 야당이 발의한 유 대법원장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며 일단락됐으나, 사법부와 법조계에 충격을 안기고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고인은 변협 회장과 한국법학원장을 마친 이후에도 세계법률가협회 아시아협회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 대한중재인협회 회장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변호사로서 국민 인권 옹호에 앞장선 공로로 198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90년에는 장학 사업을 하는 종근당고촌재단 2대 이사장을 맡아 2024년까지 무려 34년간 재단을 이끌며 육영 사업에 헌신했다.
민주화 직후인 1988년 고인은 대법원장 후보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2014년 법조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대법원장 인선 당시) 제 이름이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는데 안 된 이유를 좀 알아보니 짧지만 국회의원 생활을 한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고 한다”고 회상했다.
유족으로 부인 이선경씨와 자녀 용수·영은·영주·영랑씨, 사위 김문경·김선영·이백철씨, 며느리 이혜림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6시40분이다. (02)30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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