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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계엄령, 반복되어선 안 될 역사 [이지영의K컬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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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10 23:43:54 수정 : 2025-04-10 23: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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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령 사태 이후, 봄이 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었던 나날이었다. 탄핵 선고가 있기 하루 전날, 나는 4·3 기억영화제에서 지혜원 감독의 ‘목소리들’을 관람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특별부문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이 작품은 4명의 제주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제주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생생하게 조명한다.

 

대한민국 군경이 공산당 소탕을 명분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3만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국가폭력은 1948년부터 7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참담한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수십년이 흘렀으며, 심지어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방치되었고, 지금까지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음을 ‘목소리들’은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심장이 뒤틀리고 오그라들었다. 영화의 내용도, 영화를 보며 느낀 고통도 그저 과거의 문제로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12월의 계엄령과 그 이후의 사회적 혼란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흔적이기도 했다. 한국의 잔혹한 현대사 속 계엄령들하에서 벌어진 무수한 국가폭력은 여전히 진상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책임 있는 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여 군인들이 다시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게 한 이들, 특정한 정당이나 종교의 이름, 심지어는 ‘재미’를 명분 삼아 폭력적인 정치선동을 이어나간 이들은 바로 이런 과거를 자양분 삼아 준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란 수괴는 파면되었다. 이제야 멈춰 있던 계절의 시계가 다시 흘러가는 것 같다. 하지만 시작일 뿐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강 작가는 물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죽은 자들은 피로 쓴 헌법을 통해, 헌법재판관의 목소리로 우리 앞에 다시 도래했다. 산 자들의 빚은 늘어만 간다. 영영 온전히 완수될 수 없겠지만, 그 빚의 청산은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거꾸로 묻자. 산 자가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즉,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폭력을 어떻게 다시 대면하고, 다시 쓸 것인가? 앞서서 나간 이들에 대한 기억과 부채감, 그들에게서 받은 용기가 산 자들의 몸을 이끌어 탱크를 막아 세우고 트랙터 앞에 길을 열어낸 장면들에, 죽은 자와 함께 싸우는 산 자들의 모습에 그 답이 있을 테다.

 

이지영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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