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공격적인 비발디의 곡
가끔씩 들을 때면 회상에 잠겨
타임캡슐처럼 그 시절 떠올라
2000년대에 서울에서 지하철로 출퇴근을 해왔던 직장인들이나, 아니면 지하철이 일상인 사람들이 매일 듣는 음악이 있었다. 지하철 환승 음악이다. 지하철을 길게 타면 안 들으려고 해도 안 들을 수가 없는 음악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조화의 영감’ 중 6번 1악장이 그 음악이다. 이렇게만 들어선 어떤 음악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작곡가 비발디는 유명하지만, 영 낯선 작품이다. ‘조화의 영감’이라는 제목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잘 와닿지 않는다.
어딘가 낯설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아는 작품이다. 첫 소절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이번 역은 5호선 열차로 갈아탈 수 있는 군자, 군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등장하는 그 음악이다. 유튜브에선 지하철 환승 음악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비발디의 작품이었다.
‘조화의 영감’ 중 6번 1악장은 굉장히 빠르고, 격렬하고 또 공격적인 음악이다. 첫 소절을 듣자마자 귀를 찌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음에 평화를 주는 클래식 같은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서울 지하철공사는 왜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을 골랐을까? 왜 우리는 그 바쁜 출근길에 이렇게 불안하고 급박하기 짝이 없는 음악을 들어야 했을까?
그 의도야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강렬한 음악인 만큼 다른 행동을 하다가도, 금방 우리의 귀를 잡아끈다. 바쁜 출근길에 오른 직장인들에게 환승만큼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까? 꼭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서울 지하철은 배차 간격이 2분 내외로 아주 짧다.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앉아 있으면, 환승역을 놓치기 쉽다. 여기서 격렬한 음악이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 환승인지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줘야 하는 게 바로 이 환승 음악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음악 자체도 강렬하지만, 음악이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공격적인 음악이 등장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다음 역까진 기껏해야 2분 남짓이다. 다른 클래식 작품들처럼 여유롭게 기승전결을 가질 수 없다. 탑승객들에게 늦기 전에 환승을 안내해야 한다. 추측해보건대 ‘조화의 영감’을 고른 지하철공사 직원은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지하철 환승 음악은 국악이 대신하고 있다. 2009년부터 사용된 김백찬 작곡가의 ‘얼씨구야’를 지나, 2023년엔 경기민요 ‘풍년가’가 환승역마다 울리고 있다. 역시 제목만 들어선 어떤 음악인지 잘 모르고, 음악을 들어야 ‘아 이 음악!’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 비발디 ‘조화의 영감’을 제목만 듣고는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또 서울시민들의 투표로 결정된 음악이라 더욱 의미 있다. 오랜 시간 코로나19를 겪었던 시민들의 지친 마음이 반영된 음악이었다. 흥겹고 즐거운 음악이고, 여전히 우리에게 언제 환승을 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음악이다. ‘풍년가’도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귀를 잡아끌며 환승역을 안내한다.
그런데 가끔은 비발디의 음악이 그립기도 하다. 음악 그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시절이 그립게 다가온다. 음악이란 장르는 늘 추억과 함께한다. 아마 어떤 노래를 듣고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추억이 속수무책으로 밀려오기도 한다. 그저 음표의 결합뿐인데, 음악이란 장르는 참 신기하다. 멜로디는 우리의 모든 것을 타임캡슐처럼 기억하고 있다.
물론 ‘조화의 영감’은 사실 단지 지하철 환승 음악만은 아니다. 서양음악사 안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던 비발디가 ‘조화의 영감’을 통해 협주곡이라는 장르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겐 지하철 환승 음악으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이 음악이 서양음악사 안에서 가지는 위상은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 그래도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때의 추억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거기에 두고 왔으니. 바쁘게 오가던 지하철역, 그 순간순간의 감정들, 이런 걸 어려운 말로 관계기억이라고 부른다던데, 아무튼 ‘조화의 영감’은 나에게 그렇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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