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배구에서 신인이 데뷔와 동시에 주전을 차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또래의 선수들과만 뛰는 아마추어 무대와 외국인 선수와 날고 기는 선배들과 함께 뛰는 프로 무대에는 뚜렷한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특별한 재능과 기량이 있어도 데뷔하는 팀의 동 포지션에 더 뛰어난 선배가 있으면 코트보다는 웜업존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진다. 특히 고교도 졸업하기 전에 프로에 합류해야 하는 여자 프로배구에선 순수 신인이 주전으로 자리 잡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9월 2024~2025 V리그 여자부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도로공사의 지명을 받은 세터 김다은(19)은 재능과 운이 모두 받쳐준 케이스다. 지명 당시만 해도 김종민 감독이 “주전 경쟁도 가능한 선수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라고 했지만, 데뷔 세 번째 경기부터 스타팅 멤버로 출격했고, 이제는 4년차 이윤정(28)을 제치고 도로공사의 확고부동한 주전 세터로 자리잡았다. 세터라는 포지션이 다른 포지션보다 경험이 훨씬 더 중요하기에 더욱 이례적인 일이다. 이제는 김 감독이 “워낙 손에서 공을 쏘는 스피드가 좋아서 다른 세터는 못 쓰겠다”고 극찬할 정도다. 드래프트 동기 중 유일하게 데뷔 첫 해 주전으로 자리 잡은 김다은을 지난 7일 김천 도로공사 숙소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터치고는 큰 1m78의 신장을 보유한 김다은은 토스 구질이 빠르고, 리시브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미들 블로커의 속공을 활용할 수 있는 담대함도 갖췄다. 매 경기 경험치를 먹으며 쑥쑥 크고 있지만, 아직 그에겐 프로 무대는 어려운 게 더 많다. 김다은은 “프로에서 뛰어보니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플레이가 정교하고, 파워도 세고, 공격수들의 코스도 다양해서 수비나 이런 게 어렵더라고요. ‘역시 프로는 프로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래도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인터뷰 전날인 6일, 도로공사는 홈에서 흥국생명을 상대로 0-3으로 완패했다.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패배에 풀죽을 법 했지만, 김다은의 그릇은 남달랐다. 그는 “멘탈이 흔들릴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 연연하기보다 다음 경기 준비를 잘 하려고요. 그게 저에게나 팀에게나 도움 되는 일이니까요”라며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김 감독이 김다은을 칭찬하는 부분도 기량도 기량이지만, 성격이나 멘탈이다. 김 감독은 “뭐랄까, 그릇이 크다는 느낌을 주는 선수다. 성격도 활달하고 대가 세다. 혼내도 기도 잘 죽지 않는다. 세터로서는 딱 좋은 성격을 갖고 있다”라고 칭찬했다.
김다은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성격은 어떨까. 그는 “승부욕이 좀 세서 고등학교 땐 운동할 때 동료들에게 화도 좀 많이 내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플레이 하나가 막히면 빨리 다른 걸 생각해내려고 하는데, 프로에선 의지할 언니들이 많아서 언니들에게 도움도 요청할 수 있어 좋아요. 막내의 장점이죠”라고 답했다. 20년 이상 차이나는 최고참인 리베로 임명옥(39)을 비롯해 배유나(36) 등 고참 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김다은이다. “언니들이 무조건 잘했다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다독여주셔서 자신감 있게 하고 있어요”


김 감독은 올 시즌을 마치면 김다은에게 필요한 부분으로 감량을 꼽으면서도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해 쉽지 않을 것 같다. 항상 손에 먹을 걸 들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묻자 “먹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항상 먹는 건 아니에요. 제가 뭘 먹으려할 때마다 감독님과 마주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팬들께 받은 빵이나 부모님께 받은 먹을거리들을 언니들과 나눠먹으려고 가다가 마주치는 경우가 많거든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프로 선수에게 팬의 존재는 활력소다. 김다은도 김천 홈팬들의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선수 중 하나다. 팬들의 사랑을 실감하냐 묻자 “가끔 길 가다가 알아봐주시는 분들도 좀 생기긴 했다. 김천구미역에서 숙소로 오는 택시를 타면 기사님들이 가끔 택시비를 받지 않으시기도 해서, 그럴 때 팬이 좀 생겼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김다은은 배구인 2세다. 아버지 김상석씨와 어머니 김연심씨 모두 배구선수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상석씨는 대학교까지 배구선수 생활을 했고, 어머니 김연심씨는 실업배구 시절 LG정유(現 GS칼텍스)에 지명돼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뛰었다. 배구인 부모 덕에 배구 코트가 놀이터였던 김다은은 자연스럽게 배구 선수를 꿈꾸게 됐다. 김다은은 “세터라는 포지션을 하게 된 것도 엄마가 ‘무조건 세터를 해야해’라고 하셔서 하게 됐죠. 이후에 몇 번이나 바꾸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공격수를 하기엔 키가 큰 편도 아니어서 그냥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제 천직이죠”라고 말했다.



어머니 김연심씨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다은이 아빠도 1m88이고, 저도 1m78이라 키가 큰 편이지만, 배구를 시킬 때만 해도 다은이가 어느 정도까지 클지 모르니까요. 외국인 선수들 때문에 공격수로는 성공확률이 그리 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터를 권유하게 됐죠. 세터가 오래갈 수 있는 포지션이기도 하고요”라고 설명했다. 이어 “엄마 입장에선 다은이가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죠. 배구 선배로 보면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까 피드백도 바로바로 해주고 싶긴 하지만, 스트레스 받을까봐 조심스럽죠”라면서 “다은이가 초중고를 지나면서 한 번도 슬럼프라는 게 안 왔어요. 2년차든 언제든 한 번은 올 텐데 그걸 잘 넘겨서 오래오래 배구 선수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바람을 전했다.
한국배구연맹(KOVO)는 신인선수상의 이름을 ‘영플레이어상’으로 바꾸며 수상 자격을 1년차 순수 신인에서 3년차까지 늘렸다. 순수 신인 때 코트에 주전으로 자리 잡기 힘든 현실을 반영한 처사다. 그러나 김다은이 데뷔 첫해 주전으로 뛰면서 여자부 초대 영플레이어상 수상은 사실상 예약한 상황이다. 김다은은 영플레이어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 “20% 정도 아닐까요. 초중고를 같이 나온 (이)주아(GS칼텍스)도 있고, 정관장 (신)은지 언니도 있고...”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데뷔 첫 시즌을 10경기 남겨둔 상황에서 김다은에게 점수를 매겨달라고 하자 ‘60점’을 말했다. “저 때문에 경기 결과가 안 좋게 나온 경기도 많았던 것 같고, 코트 위에서 공격수들의 준비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공을 올렸던 적도 너무 많아서요. 아직은 절대 만족할 수 없어요”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않고 채찍질하고 있는 김다은의 롤모델은 남자부 현역 최고의 세터로 꼽히는 한선수(대한항공)와 고졸 3년차 세터 한태준(우리카드)다. 김다은은 “한선수 선배님은 노련하고, 상황 판단도 빠르고 토스가 자신있게 시원시원하게 나가는 것 같아 배우고 싶어서요. 그리고 한태준 선배님은 나이가 저처럼 어리잖아요. 그런데도 팀에서 주전을 맡아서 대담하게 플레이하며 팀을 이끄는 모습을 닮고 싶어요”라고 설명했다.
에필로그
이날 인터뷰는 원래 7일 오전 11시에 진행되기로 했다가 오전 9시로 당겨졌다.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이 선수단에 휴식을 부여한 상황. 빨리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를 나와 놀고싶어하는 김다은의 마음이 전해져 인터뷰를 당겨서 하게 됐다. 인터뷰를 마친 김다은은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김천구미역으로 향했다. 대전에서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놀기로 했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창 놀고 싶어하는 스무살의 마음이 느껴졌다.
프로 선수로서 이제 돈을 버는 김다은의 첫 월급은 어떻게 쓰여졌을까. 김다은은 “엄마, 아빠, 할머니, 동생에게 용돈을 드렸어요. 저를 위한 소비는 옷 하나 산 것 같아요. ‘아이앱 스튜디오’ 후드티요”라고 답했다. 이제 스무살이지만, 자신이 번 돈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김다은이다. 가장 많은 소비처는 역시 쇼핑이다. 그는 “아이앱 스튜디오나 스투시 같은 편하면서도 디자인 예쁜 브랜드의 후드티나 맨투맨을 즐겨 사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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