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루 벨벳’(1986)과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TV드라마 ‘트윈픽스’(1990~1991)를 만든 미국의 ‘컬트 거장’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16일(현지시간) 린치의 유족은 고인의 죽음을 알리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정확한 사인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고인은 지난해 오랜 흡연의 결과로 폐기종 진단을 받고 집 밖을 나가기 어렵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유족은 “그가 더이상 우리와 함께 할 수 없기에 세상에 큰 구멍이 났다”며 “그러나 그가 생전 말했듯 구멍이 아닌 도넛을 보라”고 전했다. 창의성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도넛의 구멍이 아니라 도넛을 주시하라”고 답했던 고인의 생전 발언을 인용한 것.
1946년 미국 몬태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린치적인(Lynchian)’이란 형용사를 만들어냈을 만큼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구축해낸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 LA 미국영화연구소(AFI) 고급영화연구센터에 입학한 린치는 부족한 제작비 탓에 완성하는 데 장장 5년이 걸린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1977)를 내놓으며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데뷔작의 컬트적 인기를 발판 삼아 두 번째 장편 ‘엘리펀트맨’(1980)을 연출했다. 코끼리 닮은 외모로 유명했던 19세기 영국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으로 린치는 미국 아카데미상 감독상·각본상·각색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후 제작비 4000만 달러가 들어간 SF소설 원작의 대작 ‘듄’(1984)을 연출을 맡았지만 흥행에 참패했고 평단에서도 혹평받았다. ‘듄’의 실패는 오랫동안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이사벨라 로셀리니, 데니스 호퍼, 로라 던 주연의 차기작 ‘블루 벨벳’이 전미비평가협회 최우수작품에 선정되며 재기한 그는 이어 ‘광란의 사랑’(1990)을 발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미국 한 시골에서 벌어진 교내 ‘홈커밍 퀸’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드라마 ‘트윈 픽스’는 선풍적 인기을 일으키며 에미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린치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1997),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인랜드 엠파이어’(2006) 등 대표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특히 헐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두 여성의 좌절된 욕망을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초현실적 설정으로 그려낸 에로틱 스릴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001년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올해의 영화’로 선정되며 평단의 상찬을 받았고, 린치의 오랜 비판자였던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조차 극찬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작품은 영국 BBC가 2016년 발표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 1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2022년 꼽은 역대 최고의 영화 리스트 8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성과 논리를 따르지 않는 기이한 세계관과 악몽 속 미로를 걷는 듯한 불안한 분위기, 장르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전개 등은 린치의 ‘초현실주의적’ 스타일의 특징으로 꼽힌다. ‘트윈픽스’에 시리즈에서 FBI 수사관 역할을 맡은 린치의 ‘분신’ 배우 카일 맥라클란은 린치의 사망 이후 자신의 SNS에 “데이비드는 우주에 완전히 맞닿아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상상력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준으로 보였다”며 “세상은 놀라운 예술가를 잃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 혼자서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고 비통함을 드러냈다.

린치는 단 한번도 전형적이고 대중적인 헐리우드 스타일을 따르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2022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에 카메오로 출연해 미국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 역을 맡았다. 스필버그는 “(린치를) 예지력을 지닌 몽상가로 여겨왔다”며 “세상은 매우 독창적이고도 독특한 (고인의) 목소리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칸영화제는 17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린치의) 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영화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예술로 영화의 가치를 이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했다. 베니스영화제도 린치를 “개인적이고 시각적인 스타일과 영화적 형식의 한계를 끊임없이 탐구해 현대 예술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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