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제롬 파월 의장이 기준금리를 0.5% 포인트 인하하는 이른바 ‘빅컷’ 단행을 발표했다. 이튿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의 경제인 클럽에서 연설하는 도중 연준의 결정을 일컬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내가 보기에는 경제 전반에 희소식”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금리가 내려가면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며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니 대선을 앞두고 집권당인 민주당에 유리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바이든 대통령은 “나는 연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며 “대통령이 된 뒤 연준 의장과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연준에 금리 인하를 요청한 적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행정부와 중앙은행의 미묘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중앙은행은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법 제3조는 “한국은행의 통화 신용 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되도록 하여야 하며, 한국은행의 자주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규정해 그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명확히 하고 있다. 하지만 한은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같은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문이다. 당장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등 경제부처 고위 관료를 지낸 인사들이 낙하산처럼 한은 총재로 보내진 사례가 많았다. 5공화국 전두환정부 시절인 1982년 1월 하영기(1925∼2022) 당시 산업은행 총재가 한은 총재로 발탁됐을 때 “첫 한은 공채 직원 출신 총재”라고 해서 금융가의 엄청난 화제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 총재 임기 동안 한은은 은행 감독 권한 등을 놓고 재무부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결국 취임 1년 9개월 만인 1983년 10월 전격 경질됐다. 후임자로는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내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사가 부임했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조순(1928∼2022)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 중앙은행장의 허약한 입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조 명예교수는 1950년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으로 복무를 하며 노태우·전두환 등 육사 11기 생도들과 인연을 맺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12월 그가 존경한 조 명예교수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했다. 1992년에는 한은 총재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이듬해 취임한 김영삼(YS) 대통령은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조 총재가 경기 부양을 밀어붙이려는 YS정부의 경제정책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993년 3월 그는 당시 재무장관으로부터 전화로 ‘정부가 바뀌었으니 그만 물러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사퇴 권고를 들었다. ‘문민 대통령’을 자처한 YS가 과거 군사정권도 가급적 보장한 한은 수장의 4년 임기를 무시하는 태도에 조 총재는 배신감을 느꼈다. 청와대가 사직서를 수리한 뒤 퇴임식을 마치고 한은 청사를 떠나는 조 총재를 향해 일부 한은 직원은 큰절을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지난달 30일 기획재정부가 있는 정부세종청사를 찾아가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만났다. 현직 한은 총재의 기재부 방문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한은 총재들은 정부 부처를 드나드는 일을 삼갔다. 이날 두 사람의 회동은 ‘지속 가능 경제를 위한 구조 개혁’이란 주제로 열린 타운홀 미팅에 함께 참가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마침 한은의 통화 정책 결정을 열흘가량 앞둔 시점이라 금리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지에 언론의 이목이 집중됐다. 금리 인하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 부총리는 “(한은의) 고유 영역”이라며 언급을 회피했다. 행여 ‘정부가 한은에 금리를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는 식의 뒷말이 나올까봐 우려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 총재는 역대 한은 수장 가운데 가장 튀는 ‘행보’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재부 청사 ‘깜짝’ 방문 같은 이벤트도 좋지만 통화 정책 결정만큼은 재정 당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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