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 암살 명분으로 공작 강행
국제적 비난에도 악역 마다 안 해
핵 역량 강화하는 北 우려스러워
통신장비가 폭탄이 됐다. 헤즈볼라는 지난 9월 17일과 18일 궤멸적인 피해를 보았다. 이스라엘의 감청을 피하려고 헤즈볼라가 사 온 호출기(삐삐)와 무전기가 폭발하여 42명이 사망하고 3500여명이 부상했다. 피격 대상은 주로 헤즈볼라 조직원들이다. 이 폭발은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주도한 것으로 추측되어 21세기판 ‘트로이 목마’ 공격으로 평가된다.
이스라엘은 상상을 뛰어넘는 공격으로 주변국을 압도해 왔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을 벌여 이집트와 시리아를 예방적으로 제압하고 남쪽 시나이반도와 북쪽 골란고원을 차지하며, 지금까지도 국가가 생존하는 기반을 다졌다.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로 자국선수단 11명이 학살당하자, 테러 배후인 파타그룹을 상대로 무려 7년간이나 보복을 계속하여 최소 14명의 주요 인사를 제거했다.
이스라엘은 암살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모사드와 아만(군 정보부)을 투입하여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대상을 제거한다. 올해만 해도 하마스 수장인 이스마일 하니야와 헤즈볼라 군사지도자인 푸아드 슈크르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삐삐 폭탄’만 해도 최소 2년 이상을 공작활동에 공들여온 결과 헤즈볼라의 공급망에 침투하여 스스로 폭탄을 구매하게 하였다.
물론 이스라엘의 국가적 암살은 논란의 대상이다. 테러범을 제거하는 대테러 작전에 성역을 둘 수 없다는 주장과 타국의 사법 관할을 무시한 초법적 처형이라는 주장이 충돌한다. 게다가 이번 호출기·무전기 폭발은 광범위한 공격 특성상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기발한 공격도 좋지만 무차별 공격으로 희생자를 발생시킨 것은 테러집단으로 간주하는 하마스나 헤즈볼라와 차이가 없다는 비난을 받을 법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비난을 노련히 회피한다. 우선 디아스포라(강제이산)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라는 핍박의 역사와 반복되는 아랍 테러를 겹치면서 생존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600만명이 학살당했으니 웬만한 유럽국가는 숙연해질 만하다. 그럼에도 이번 공격처럼 비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경우에는 모호성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 이스라엘과 같은 처절함으로 안보에 사활을 거는 집단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지난 9월13일 고농축 우라늄 제조시설을 최초로 공개했다. 공개된 시설은 1000여개의 원심분리기로 1년 돌려야 핵폭탄 1개분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로 보인다.
북한이 연간 핵탄두 12~18발에 해당하는 핵물질을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산정책연구원과 미국 랜드연구소의 2021년 연구 결과다. 이러한 추산치를 적용하면 북한은 이미 작년에 핵물질 누적생산량이 150발에 이르렀다. 그리고 2027년 200발을 넘겨 2033년은 300발, 2040년에 400발, 2047년부터는 500발 분량을 확보하게 된다.
북러협력으로 재래식 무기를 러시아로 넘겨주면 줄수록 북한의 핵 의존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핵무기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라는 김정은의 반복적인 지시도 그런 맥락이다. 이를 입증하고자 북한은 8월 초 미사일 발사차량 250대를 모아놓고 인도식을 거행했고 이제 우라늄 농축시설까지 보여줬다. 이렇듯 ‘우리는 한다면 한다’는 오기야말로 북한의 진정한 국방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오기가 핵사용에도 적용되는 경우다. 오기가 오판으로 이어져 전쟁으로 비화하는 경우는 역사 속에 반복된다. 이미 100발을 넘은 시점부터 북핵위협은 강력한 핵 억제력이 아니면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 정부가 한미동맹과 핵협의그룹(NCG), 그리고 한미 공동핵작계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역도 마다치 않는 리더십이다. 적의 공급망까지 침투하여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치밀함과 과감함을 돌이켜볼 시점이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외교안보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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