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인구 10.4%에 일자리 제공
양질 발굴보다 숫자 늘리기에 급급
대부분 단순직 그쳐 효능감 떨어져
복지부, 노인 일자리 사고 관리체계 강화
관리자 근무 부담 경감·급여 인상 추진
2024년 14만7000개·2025년 6만8000개↑
할당받는 지자체들 벌써부터 걱정
“세수 부족해 기관 증대는 언감생심”
질적 개선 대신 참여자 숫자에 치중
2명이 해도 될 일을 5∼6명이 맡아
전문가 “예산 늘려 새 일자리 발굴을”
“이제 완전히 ‘폐계’(廢鷄)야. 계란 다 낳고 털도 없고 기운도 없으니까 싸게 팔려 나가는 거지.”
지난달 9일 서울 강서구의 한 주차장 경비실에서 만난 이모(73)씨는 자신을 늙은 닭에 비유했다. 이씨는 노인일자리 프로그램으로 일주일에 3번, 3시간씩 이곳에서 주차 차량을 기록하고 요금을 받는 일을 한다. 주차타워는 기계식 정산이라 이씨가 계산하는 건 주차장 3칸으로 이 중 1칸은 볼라드가 설치 돼 있어 사용이 불가능하다. 나머지 2칸도 비어 있을 때가 태반이다.
인적이 드문 폐쇄회로(CC)TV 화면 한 번, 창밖을 한 번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이씨는 “주차 요금 얼마예요”라고 묻는 청년이 다가오자 단숨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예에, 오백원만 주면 됩니다.” 이씨는 이날 3시간의 근무시간 중 딱 1번 주차 요금을 받았다.
이씨는 원래 50년 경력의 베테랑 버스 운전사였다. 22살에 대형 영어학원에 취직해 정년퇴직할 때까지 운전과 총무 일을 했다. 그 뒤로 칠순까지는 구청 스포츠센터에서 운전을 했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이씨의 눈은 반짝였다. 이씨는 “젊은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해질 때까지 바쁘게 일했다”면서 “나이 먹으니 이렇게 (직장에서) 쫓겨나 가지고 돌아다니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노인일자리를 잡기 전까지 2년 남짓한 구직 기간은 그에게 암흑기였다. 이씨는 “나이를 먹으니 가만히 집에 들어가 있으면 잡념만 생기고, 술이나 먹게 된다”며 “그래도 여기 나와 있으면 훨씬 좋아. 잠깐잠깐 젊은 사람도 보고”라고 했다.
바삐 일해 키운 두 자녀는 독립했고, 이씨는 부인과 36살 아들과 함께 셋이서 살고 있다. 당장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이씨는 “더 오래 일하고 많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일자리가 있냐’고 묻자 이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노인일자리라고 해봤자 뻔해. 우리는 경비나 서고 여자분들은 청소하는 거지….”
‘63.3%.’ 7월 고용률은 2013년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대 수준(7월 기준)을 기록했다. 취업자 수로는 2885만7000명이다. 정부가 자랑하는 일자리 통계에는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노인도 포함된다. 노인일자리도 엄연한 일자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노인일자리에 참여하는 노인들은 사회참여, 건강증진, 소득증대를 이룰 수 있는 이 사업을 반기면서도 은근히 일의 질이나 자신들의 처지를 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업을 운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취재진이 만난 노인일자리 참여 당사자부터 지방자치단체와 수행기관, 수요처 관계자들은 노인일자리의 취지에는 깊게 공감하면서도, 일자리의 생산성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현장 전문가들은 ‘일자리 밀어내기’ 관행이 이 같은 문제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정부가 노인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를 발굴해 제공하기보다 숫자를 늘리는 데만 골몰한 탓에 노인일자리가 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자체 “수행기관 이미 포화상태”
2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노인일자리를 109만8000개로 확대한다. 내년 노인 인구(1051만명)의 10.4%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목표다. 올해(103만개)보다 6만8000개 늘어난다.
노인일자리 확대는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이뤄진다. 복지부와 기획재정부가 협의해 목표치를 정한 뒤, 인구를 고려해 광역시·도에 배분하면 광역시·도는 시군구에 배당하는 식이다.
올해 14만7000개를 늘린 데 이어 내년에도 노인일자리를 대폭 늘린다는 소식을 들은 지자체들은 걱정이 앞선다. 지자체는 노인을 관리한 경험이 있고 규모가 큰 기관을 선발해 노인일자리 사업을 위탁하는데, 이 수행기관을 늘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청 관계자는 “올해 복지관 등 수행기관을 3개나 늘려서 이제 더 늘릴 기관도 없다”며 “도청에 얘기해서 (할당량을) 적게 받든지, 지금 하고 있는 기관에 몇 개 더 맡아 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새로운 수행기관을 찾기 어려워 기존 기관들을 통해 일자리를 급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기존 기관의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수행기관을 늘리는 것보다 경제적인 방법이다. 노인일자리 사업의 규모는 중앙에서 정하지만, 노인일자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예산은 지방비로 충당한다. 정부는 노인일자리 참여자와 담당자 인건비를 절반(서울은 30%)만 보조할 뿐이다. 기존 수행기관에 참여자만 늘릴 경우 참여자 인건비만 늘어나지만, 수행기관을 늘리면 시설과 인력에 새롭게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한 구청 관계자는 “기관이 하나 늘어나면 예산은 배로 늘어난다”며 “정부는 보조금만 얼마 주면 되지만, 사업을 실제 구현하는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열악한 세수를 더 쥐어짜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행기관을 늘리기보다 각 기관이 운영하는 일자리만 늘리는 관행이 굳어진 지는 오래다. 지난 5년간 노인일자리는 20만개 넘게 늘어난 반면 수행기관은 고작 8개 증가하는 데 그쳤다.
복지부 산하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노인일자리 수행기관은 2020년 1297개에서 올해 6월 1305개로 0.6% 증가했다. 노인일자리 참여자가 73만8895명에서 96만1978명으로 30.2% 늘어난 것과 비교된다.
◆“시킬 일 없어… 질적 개선해야”
수행기관이 억지로 공급만 늘리다 보니 현장(일터)에서도 참여자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복지관에서 조리사로 근무하는 A(45)씨는 “점심 70인분만 준비하면 돼서 두 명이면 충분한데, 노인일자리 어르신 5명이나 같이 코딱지만 한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며 “복지관은 어르신이 돈 받고 일하는 거니까 3시간을 채워 일하게 하라는데, 시킬 일이 없다. 다진 마늘 대신 깐 마늘을 들여와서 꼭지를 따게 하거나 멸치 똥 따는 일을 시키고 있다”고 털어놨다.
11월 시행되는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노인일자리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노인일자리 기회를 보급할 뿐 아니라 개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정부가 노인 인구 증가에 맞춰 노인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은 좋지만, 이제 노인일자리가 100만개로 늘어난 만큼 노인일자리 개발에도 힘을 쏟을 때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인이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를 새롭게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개발원이 발간한 ‘공공형 노인일자리 참여자 경험 연구’ 보고서는 “일자리 사업의 수행기관을 확대하고 다변화시켜야 노인일자리 참여 노인과 수혜 주민에게 모두 긍정적인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정부가 일자리 품질을 강화한다면서 공익형보다 사회서비스형 위주로 늘리라고 하니 최근 지자체들은 사회서비스형 일자리 100개를 맡던 기관에 200개 하라고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노인일자리 예산을 편성할 때, 늘어난 일자리 수에 맞게 사업을 수행할 기관과 인력도 늘어날 수 있도록 예산을 확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복지부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수행기관 다변화는 지자체의 역할이라서 중앙에서 예산을 지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복지부는 정부 통계에 잡히지 않은 미확인 노인일자리 사고가 지난 5년간 4000건 넘게 있고, 일자리 관리 담당자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본보 보도 후 개선책 마련에 나섰다.
복지부는 노인일자리 사고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보험금을 지급하는 상해보험사와 정부 시스템의 연계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이날 밝혔다. 또 노인일자리 담당자 1명이 담당하는 노인 수를 줄이고, 담당자의 급여 인상 방안을 재정당국과 협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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