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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네 번째 어금니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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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18 23:02:04 수정 : 2024-06-18 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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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왼쪽 볼이 부어 있었다. 충치야? 내가 묻자 친구는 애도 아니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니가 난 것 같아.” 나는 당장 치과에 가라고 말했다. 옆으로 돌아누운 사랑니를 바수어 뽑느라 혼쭐이 났던 나는 사랑니라는 단어만 들어도 턱이 욱씬거렸다. 붓긴 했는데 딱히 아프진 않아.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흘깃 시계를 보았다. “병원 갈 시간도 없고.”

지금 맡은 프로젝트 기한이 너무 짧아 치과는커녕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친구는 이번만 바쁜 게 아니었다. 입사한 이래 그는 다양한 이유로 바빴고 늘 시간에 쫓겼다. 친구네 회사 앞으로 찾아가야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을 수밖에. 나는 친구의 상사를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그토록 많은 일을 떠넘기는 걸 보면 몹시 무능하거나 뻔뻔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네가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너네 팀장은 대체 뭘하는데?” 내가 따지듯 묻자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도 일을 하지. 하루 종일 모두가 일을 해. 일단은 일이 너무너무 많고 직원은 터무니없이 적으니까.” 친구의 말대로라면 모두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데 인력충원이 안 되니 그만두는 사람이 생기고, 그럼 그만큼의 업무가 또 모두에게 부여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너도 그만두고 나와. 친구는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고, 이직이 쉬운 줄 아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여기서 너무 오래 일했어. 다른 회사에 적응하려고 애쓰거나 새로운 걸 배우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아.” 왼쪽 볼을 쓰다듬으며 친구는 회사로 돌아갔다. 나올 때보다 더 어두운 낯빛이었다. 일도 나이도 겁도 너무 많은 친구에게 조언이나 걱정을 건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뭐든 너무 많네. 나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며칠 후 친구는 대뜸 전화를 걸어서는 사랑니가 아니래, 라고 말했다. 야간진료하는 치과가 있어 들어갔더니 의사가 이건 못 뽑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랑니가 아니라 어금니래.” 나는 어리둥절해져 다시 물었다. 어금니라고? “드물게 어금니가 늦게 나는 사람이 있대. 이 나이에 어금니가 난다니, 애도 아니고.” 친구가 혼잣말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네 번째 큰 어금니가 이제서야 난다니. 그럼 나는 지금껏 어금니 세 개로만 살아온 셈이잖아? 아직도 덜 자랐네, 내가.” 친구는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잠시 멈추었다. “내가 아직도 덜 자랐네.” “한참 덜 자랐지.” “아직도 자랄 게 남았었네, 내가.” “한참 남았지.” 친구가 고요히 웃었다.

충치가 되지 않도록 관리에 특히 신경쓰라고, 의사가 잇솔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도 했다. “어금니도 새로 났는데 이 참에.” 나는 그다음 이어질 친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친구가 아직 말도 안 끝났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네 번째 어금니만큼이나 뒤늦은, 그러나 더없이 선명한 웃음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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