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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 청초호변에 차린 조선소… 문화공간으로 대변신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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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12 07:00:00 수정 : 2024-06-11 20: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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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배 목수의 전설”, 속초 칠성조선소

6·25 때 원산서 피란 온 최철봉씨
고향 가까운 속초에 터 잡고 설립
수산업 호황에 한때 흥행가도 달려
목선 폐선 권장 정책에 급격히 쇠락

손주는 레저선박 사업으로 대물림
현재는 박물관·살롱·카페 꾸며 운영
곳곳에 과거의 흔적 고스란히 남아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중심은 남해안이다. 복잡하고 굴곡이 심한 해안선과 수많은 섬이 항구가 발달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하며, 배를 만들 때 필요한 충분한 수심 확보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대한 배를 만들 때 요구되는 야외 작업을 연중 내내 가능케 하는 온화한 날씨도 남해안에 조선산업이 발달한 이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다가 있는 곳에는 배가 있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배를 만들거나 최소한 수리할 수 있는 조선소는 남해안이 아닌 곳에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다른 바다에서 조선소를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속초에 있는 칠성조선소에서 지역에 있었던 작은 조선소의 운명과 그곳에서 일했던 이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소를 운영했던 최승호가 쓴 ‘칠성조선소’라는 글씨는 나무배를 만들었던 장소와 삶의 기억을 함축하고 있다. 칠성조선소는 속초에 조선소와 배 목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줌으로써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전해 준다.

칠성조선소의 전신은 원산조선소다. 조선소를 설립한 이는 최철봉으로 남만주로 징용 갔을 때 포항 출신의 배 목수를 만나 배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원산조선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고향은 함경도 원산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란을 오게 됐다. 어쩌면 흥남 부두에서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었을 수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최철봉은 고향과 가까운 속초에 정착했다. 그와 같은 목적으로 속초에 터를 잡은 실향민들이 만든 마을이 바로 ‘아바이마을’이다. 최철봉은 바닷가 마을이니까 배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1952년 조선소를 차렸다. 더불어 고향으로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교통편을 늘 옆에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산조선소는 청초호 변에 있다. 청초호는 바닷가의 모래사장으로 동해와 분리되어 생긴 호수로 1시 방향에서 바다와 연결된다. 해안선이 단순한 동해안에서 청초호와 같은 석호(潟湖)는 항구가 들어서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최철봉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1980년대 속초의 수산업이 호황을 이루면서 가족의 생계는 나아졌다. 당시 동해안에 명태와 오징어가 많이 잡혀서 다른 지역의 배들이 속초로 올 정도였다. 넘쳐나는 오징어를 감당하지 못해 아무 데서나 말리기도 했는데 그래서 오징어 썩은 내가 도시 곳곳에 진동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통영이나 여수처럼 한때 잘나갔던 항구도시에서 오르내렸던 “길거리를 배회하던 개들도 1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라든가 “괜히 돈 자랑했다가 망신만 당했다”는 과장된 묘사는 당시 속초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도 들을 수 있다. 그 시절 속초 내 조선소도 12곳으로 가장 많았다.

조선소를 운영해 온 최씨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한 살롱.

그런데 속초 조선산업의 사양은 너무 금방 찾아왔다. 노후된 설비도 문제였지만 1980년대부터 정부에서 시작한 목선 폐선 권장과 보상금 지급 정책이 결정타였다. 이때부터 목선은 FRP(Fiber Reinforced Plastics, 섬유강화플라스틱) 선박으로 빠르게 대체됐다. 당연히 배 목수의 일거리도 급격히 줄었다. 조선소의 쇠락은 최철봉의 아들 최승호와 그의 형제, 친척이 함께 견디기에는 너무 큰 흐름이었다.

 

그럼에도 최승호의 아들 최윤성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조소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 있는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조선소 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결정이었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귀국 후 최윤성은 레저 선박을 만드는 ‘와이크래프트 보츠(Ycraft Boats)’를 칠성조선소 내에 설립했다.

현재 칠성조선소는 배 만드는 곳이라기보다는 배를 만들었던 시절의 기억을 품은 복합문화공간이다. 야외 작업장을 가운데 두고 ‘ㄷ’자로 배치된 세 건물은 과거 배를 만들고 수리했던 작업장과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지금은 박물관과 살롱으로 쓰인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와이크래프트 보츠의 작업장은 카페다. 그래서 카페 천장에 설치된 호이스트 크레인을 볼 수 있다. 그 외 나무를 가공했던 제재소는 조형물이 있는 플레이스케이프(Playscape)다.

칠성조선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안전제일’ 마크 가운데 적힌 ‘칠성조선소’는 최윤성의 아버지 최승호의 글씨체다. 그는 배를 다 만들거나 고친 후 바다로 내보내기 전에 배의 이름을 직접 썼다고 한다. 선주들은 배에 적힌 글씨체를 보고 어떤 조선소에서 매만진 배라는 걸 알아차렸다. 최윤성은 아버지의 글씨가 칠성조선소의 아이덴티티(Identity)라 생각하고 글씨체를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북양’이라는 이름의 목선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

박물관에는 반쯤 속을 드러낸 목선이 전시돼 있다. 배는 매끈한 곡선을 이루어 파도를 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나무는 굽어 있기보다 곧다. 곧은 나무를 배 목수들은 어떻게 구부렸을까? 얇은 목재를 겹겹이 붙이거나 높은 온도의 스팀을 이용한 우드밴딩(Woodbanding) 기법이 있지만 조선소에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배 목수들은 처음부터 구부러진 나무를 찾거나 곧은 나무를 일부러 틀었다. 이 지점이 집 목수와 배 목수를 구분한다. 집은 바로 서 있어야 하기에 집 목수는 곧은 나무를 잘 짜맞추어야 한다. 반면 배 목수는 긴 목재를 구부러뜨려 유선형을 만드는 데 능해야 한다. 그래서 배 목수는 집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집 목수는 목선을 만들기 힘들어한다. 배 목수들의 최고 기술은 배에 물이 새지 않게 만드는 데 있다. 비법은 넓적 못을 박기 위해 망치로 때렸던 자리가 차츰 불면서 목재 사이를 막는 것이다. 솜씨 좋은 배 목수는 틈으로 종이를 넣어 종이가 젖으면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 김영건·최윤성).

일본 디자이너 하라 겐야는 그의 책 ‘저공비행’에서 “얼마나 몰랐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효과적인 소통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기존 영역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대상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사람들의 흥미는 저절로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윤성은 자신의 기억 깊은 곳에 있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환해 지금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배 목수라는 직업과 속초에 조선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카페에서 ‘포트(Port)’라는 이름의 원두로 내린 커피를 들고 야외 작업장으로 나왔다. 작업장은 배를 진수(進水)하기 편하도록 여전히 바다를 향해 기울어져 있다. 평상 아래 깔린 레일 위에 올려져 있었을 나무배를 떠올려 봤다. 그러자 망치질과 대패질을 하는 최씨네 삼대가 그려졌다. 들리지 않는 망치 소리를 상상할수록 배 목수들이 일하는 장면은 더욱 또렷해졌다. 잠시 후 배 목수 한 명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와 줘서 고맙다’는 눈빛을 내게 보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상상 속 배 목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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