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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로와정 개인전… ‘눈길에도 두께와 밀도가 있다’

입력 : 2024-06-08 09:59:38 수정 : 2024-06-08 09: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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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유머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개념미술
로와정 개인전 ‘눈길에도 두께와 밀도가 있다’
상식과 관습을 깨는 진보적 발상 - 현대미술 추동력

전시장에 들어서면 날자를 알아볼 수 없는 달력이 관람객을 맞는다. 달력 위 칸에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 대신 분열하고 변이하는 세포 이미지들의 몽타주가 있다. 160년 후 2184년, 지구에서 인간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달력은 12장이 포개어져 있어 제대로 숫자를 구분하기 힘들다.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달력의 시간은 사실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삶에 진리처럼 작용한다. 작가는 달력(제도)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진리처럼 인식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애매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작가 로와정의 개념미술 작품 ‘2184’다.

‘2184’

푸른 쪽빛의 커튼이 가로 봉에 매달려 있다. 커튼 중간이 말려있는데 여기엔 무언가 문구가 적혀 있다. 풀어헤쳐 읽어보면 “땅에 발을 딛고도 매달려 있는 기분입니까?”다. 커튼 아랫부분이 땅에 닿아 있다. 커튼 윗부분은 여전히 철봉에 매달려 있다. 커튼 입장에서 질문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작가는 언어와 이미지의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언어체계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 우리는 상대방의 언어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오해를 거듭하며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언어는 진리의 그릇이지만 폭력의 무기이기도 하다. 언어에 관한 진정한 성찰에서 문화의 건전한 힘이 나온다. 작품 ‘커튼’이다.

‘커튼’
‘imago’

바닥에 놓인 ‘imago’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주석 또는 청동 단지에 ‘이것은 공상적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This was inspired by an imaginary story)’라는 문구를 써넣어 완성한 작품이다. 모든 사물을 비추는 카메라 렌즈를 연상시키면서도 때로는 모든 이미지를 삼키는 깊은 우물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지를 뜻하는 라틴어 ‘imago’는 모든 상상과 개념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동시에 미지에 갇힌 공간이다.

 

미국에서 개념미술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다. 우리나라도 그 중요성을 인지해 재빨리 도입했다. 이미 다수의 작가가 성과를 냈다. 김구림(1936-)·주재환(1941)·성능경(1944-) 등 쟁쟁한 이들이 토대를 닦았고, 박이소(1957-2004)·김홍석(1964-) 등은 포스트모던 시기의 특성을 파악해 이를 심화시켰다. 개념미술의 전통에서 삶의 상식을 뒤엎는 발상으로 세계적 호응을 얻은 김범(1963-) 역시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후 로와정(1981-)은 백정기(1981-) 등과 함께 신진 개념미술가로 뚜렷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미래에 회자될 만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개념미술은 상식과 관습을 깨는 진보적 발상으로 현대미술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신진 작가가 기존의 문맥에 없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때, 그 문화 토대는 더 확장되며 탄탄해진다.

 

로와정의 개인전이 7월6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에서 ‘눈길에도 두께와 밀도가 있다’라는 문패를 내걸고 19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로와정(RohwaJeong)은 노윤희(1981-)와 정현석(1981-)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컬렉티브의 명칭이다. 로와정은 불과 20대 중반인 2007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유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작품은 주제나 형식이 반복되지 않고 대부분 새롭게 펼쳐진다. 로와정은 ‘무한한 지평을 달리는 수평적 사유의 작가’로 평가 받는다. 일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해낸다. 난해하고 건조한 개념미술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시학으로 승격시킨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실재와 이미지(가상)의 철학적 구분을 무효화시키며 언어와 사물의 상하, 전후 관계를 뒤집는다.

‘salt of the earth’
‘무제’

속옷 두 벌을 교차해 안으로부터 조명을 비춰 별을 만든 작품 ‘밤마다 행복했으면’(2010), 집안의 모든 사물을 원형으로 배치한 후 조명의 빛을 마스킹테이프로 형상화해 다시 원뿔형으로 연결한 ‘생활의 발견’(2010), 오래 써 흠집이 난 도마에 안녕을 고하며 ‘bye - bye’라는 두 단어를 새긴 작품 ‘Bye - Bye’(2014), 인쇄물 곳곳에서 수집한 나무가 있는 사진(이미지)에서 나무를 도려내고 그 위에 실재 나무 모양을 일으켜 세워, 관객에게 이미지와 사물의 위계(位階)를 재고하게 한 작품 ‘Souvenir of somewhere (tree)’(2013) 등 대부분의 작품들이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지난 18년 동안 쉼 없이 활동했는데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깊은 시적 감수성이 놀랍다.

 

로와정은 철학, 언어학, 역사학, 문학, 매체학, 미술사를 쉼 없이 연구하며 작품에 반영한다. 이번 ‘눈길에도 두께와 밀도가 있다’ 또한 마찬가지다. 눈길은 ‘눈이 쌓인 길(snowy road)’이기도 하지만 ‘시선과 관심(eyes, attention)’이라는 뜻도 지닌다. 지나치는 일상에서도,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훈련과 공부를 통해 깊어지며, 그렇게 깊어진 시적 사유야말로 예술의 샘(origin, 根源)이 된다는 것이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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