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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전세의 기원과 정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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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5-27 23:05:15 수정 : 2024-05-28 09: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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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때도 전세사기 및 보증금 손실 위험이 있었다.”

기자의 두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문구다. 전세사기 문제로 우리 사회가 큰 홍역을 치른 뒤라 더욱 그랬다.

이강진 산업부 기자.

한국주택금융공사(HF) 산하 주택금융연구원의 최영상 연구위원은 300여년 전 존재한 ‘세매(貰賣·세를 받고 팔다) 관습’이 현 전세 제도와 채권·금융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전세사기와 역전세가 터져 나오며 전세의 문제점이 대두했지만, 실상 그 위험은 수백 년 전부터 도사리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매는 집주인이 현재의 전세 보증금과 유사한 세전(貰錢)을 받고 본인 소유 집에서 임차인이 살 수 있도록 하되, 세전을 돌려주면 다시 집을 찾을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최근 만난 최 연구위원은 조선 때부터 존재한 ‘서울(한성) 집중’ 현상에 ‘가문본가(家門本家) 중시 관념’ 등이 겹치며 세매가 형성됐다고 짚었다. 수요 측면에선 과거제가 지방 양반들의 서울 주거 필요성을 높였다. 공급 측면에선 왕실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아 서울에 터를 잡은 사대부들의 후손이 궁핍해지자 아예 집을 팔아버리기보단 그나마 집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 세매를 원한 점이 주요했다. 수요와 공급이 들어맞으면서 사인(私人) 간 계약이 형성된 셈이다.

문제는 집의 사용수익권을 담보로 한 사적 대출인 세매에는 보증금 미반환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무관 노상추(盧尙樞, 1746∼1829)는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노상추일기’에 악덕 임대인의 횡포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날 뻔한 사례를 적기도 했다. 보증금을 이미 다 써버린 집주인이 후속 임차인에게 받은 보증금을 선순위 임차인에게 돌려주는 식의 ‘돌려막기’ 행태가 드러난 대목도 눈에 띈다.

당시에는 그나마 양반 간 족보 확인이 일상화돼 있어 임차인이 집주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고, ‘내 돈을 떼먹진 않을 것’이라는 신용이 존재했다. 지금은 임차인이 집주인의 신용 상태나 재산·부채 등의 정보를 확인하는 게 쉽잖은 정보 비대칭 상황으로, 전세 관련 문제점들의 발단이 되고 있다.

전세 제도의 근본적 한계점은 현대에 들어 더 복잡다단해진 제도 속 임차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개입 및 지원 필요성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 보증금을 후속 임차인에게 전가하고 있는 집주인이 상당수인 데다 전셋값이 다시 고꾸라질 경우 언제든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야의 공감대 속 지난해 제정된 전세사기특별법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세의 기원과 한계점을 고려할 때 ‘선(先)구제 후(後)회수’를 담은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쟁은 특별하다. 정부의 책임 범위에 대한 기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증금을 떼일 위험까지 안고 진행된 사인 간 계약이라는 견해와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정부가 사전에 막지 못했다는 주장이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치권의 강대강 대치 속 무조건적인 찬반보다는 전세의 기원과 한계에 기반한 논의로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뒷받침된 법 개정이 이뤄지길 바란다.


이강진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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