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무효·이혼은 법률적 실익 달라
무효 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가능
자녀 민법상 ‘혼인 외 출생자’ 판단
일상 가사채무 연대책임도 못 물어
법조계 안팎선 “합리적 판결” 환영
소송 남발 땐 ‘재판 지연’ 심화 우려
대법원이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의 전원합의체 선고로 “이혼했더라도 혼인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기존 판례를 40년 만에 변경하며 혼인 관계를 전제로 한 법률 분쟁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법조계 일각에선 단순히 혼인 기록을 지우려 소송하는 경우가 많아지면 악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3일 A씨가 전 배우자 B씨를 상대로 낸 혼인 무효 확인 소송을 파기자판하며 이혼 신고를 마친 A씨에게 혼인 무효 확인의 이익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무효인 혼인과 이혼은 법적 효과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무효인 혼인은 처음부터 혼인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당사자들은 애초에 부부가 아니었던 상태가 된다.
혼인이 무효라면 민법상 인척간 혼인 금지와 형법상 친족상도례(친족 간 재산 관련 범죄는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특례)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민법상 일상의 가사 관련 법률행위 채무에 대한 연대책임도 물을 수 없다.
반면 이혼의 효력은 장래에 대해서만 발생한다. 이혼한 뒤에도 이혼 전 혼인을 전제로 한 법률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법원은 “무효인 혼인 전력이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의 정정 요구를 위한 객관적 증빙 자료를 확보하려면 혼인 무효 확인의 소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A씨는 항소심 과정에서 “국가나 지자체에서 미혼모 가족을 위한 다양한 지원 사업의 혜택을 받지 못해 혼인 무효 확인의 이익이 있다”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한부모가족 중 미혼모 가정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지원 요건과 필요성에 따라 혜택이 일부 달라질 가능성이 존재할 뿐,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변동을 초래한다고 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법에 따라 혼인 무효는 당사자들 간 혼인의 합의가 없거나 8촌 이내 근친혼 금지규정을 위반한 경우, 직계인척이나 양부모계 직계혈족 관계인 경우에 국한된다. 판결로 확정되면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신청할 수 있다. 당사자들 사이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외의 출생자’가 된다. 자녀 양육 문제는 당사자들 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당사자 청구나 직권으로 법원이 정한다.
대법원은 “무효인 혼인 전력이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 등으로 불이익을 받아 온 당사자의 실질적인 권리 구제가 가능하게 됐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현재 진행 중인 혼인 무효 소송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법원 관계자는 “(일선 법원에서) 대체로 대법원 판례를 존중해 판단을 내려, 심리 중인 사건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확정판결을 받았다면 다시 (혼인 무효를) 청구하긴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 판례 변경은 재심 청구 사유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혼인 무효 소송 자체가 많진 않다. 2022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혼인 무효 및 취소 소송은 1심 기준 643건에 그쳤다.

법조계 안팎에선 “합리적이고 전향적인 판결”이라며 환영하면서도 남용 우려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문혜정 법률사무소 정 변호사는 “이혼과 달리 혼인 무효는 혼인으로 발생한 가사 채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 등 법률적 실익이 있다”며 “혼인 의사가 없었다면, ‘이혼했으니 헤어지는 건 똑같지 않으냐’는 게 아니라 (무효로) 되돌리고 싶을 테니 합리적 판결이라 본다”고 말했다.
이승우 법무법인 정향 변호사는 “기존엔 하루빨리 혼인 관계를 해소하고 싶은 사람들이 요건이 까다로운 무효 소송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이혼소송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면서 “이번 판결로 일단 이혼하고 차분히 무효 소송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단순히 혼인 기록을 지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단히 무효 소송을 하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어, 가사사건 업무량이 늘어 사건 처리가 지체될 우려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해 외국인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국적을 취득한 뒤 이혼하는 등 국제결혼 관련 혼인 무효 소송에 영향이 있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이혼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관련해 불이익이 존재하고,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불이익이 크다”며 “중·장기적으로 이혼 뒤 혼인 무효 소송이 필요 없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