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선 숲길·예술의전당 등
다양한 사회문화 공간 설계
치유와 회복의 장소 만들어
경춘선 숲길,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 양재천 숲길, 예술의전당, 파주출판도시…. 내가 사랑하고 자주 찾는 이 공간들이 모두 같은 사람의 손길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정영선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보면서였다. 너무 자연스러워 원래부터 그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줄 알았던 장소들 뒤에 정영선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선생은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로서 다양한 사회문화적 공간들을 설계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데 평생을 바친 조경가다.
‘땅에 쓰는 시’는 정영선 선생이 설계한 주요 공간들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비추면서 그의 일상과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다. “겨울에 아름다우면 나머지 계절도 아름답다”는 영화 속의 말처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 공간들은 계절마다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호암미술관의 희원, 제주의 모헌, 포항의 별서정원 등 전통적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정원도 있고, 독립기념관, 탑골공원, 광화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등 국가적 상징성이 강한 공간들도 있다. 그런 공간들 역시 경직된 위용을 드러내기보다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도록 조성되었다.
정영선 선생은 조경가로서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녔을 뿐 아니라 조경의 공공적 역할에도 충실했다. 아산병원에는 환자나 가족들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주차장 위에 키 큰 나무들을 심었고, 선유도공원에는 정수장 시설과 건물 잔해를 그대로 살려 그 공간의 역사성을 보존했다. 생태공원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여의도 샛강에 주차장을 만들려는 공무원들에게 김수영의 시 ‘풀’을 읊으며 설득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렇게 지켜낸 숲과 공원이 없었다면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삭막한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정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마음껏 쉬고, 걷고, 뛰어놀 수 있는 공원을 만든다는 것은 평등과 공공성에 기반을 둔 문화적 실천이라고 할 만하다.
식물을 대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예쁘지 않고 귀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는 원예용 식물이 따로 없다. 어떤 공간을 구상할 때 그 땅의 생김새나 내력, 주변 경관을 잘 살피고, 대지의 특성과 기후에 맞는 수종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외래종보다는 재래종 식물을 심고, 야생에서 자라는 풀도 정원의 식솔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머릿속에 그려보며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한다. 선생이 만든 숲이나 정원이 세월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조경은 이렇게 공간을 다루는 일인 동시에 먼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의 예술이기도 하다.
“조경가는 연결사”라고 선생은 말한다. 이 말처럼 조경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 건축과 조경 등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연결해내는 사람이다. 선생은 작업을 하는 동안 시를 자주 떠올리신다고 했는데, 자연을 대하는 그의 시선과 감탄사 속에는 이미 시적인 정신과 감각이 풍부하게 깃들어 있다. 생각해보니 시와 조경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한다는 점, 타자나 대상에 열심히 귀 기울이고 그 말을 읽어낸다는 점,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해 새로운 질서를 구현해낸다는 점, 사람들에게 영감과 치유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전시장 벽면에 적힌 선생의 문장 역시 조경의 시적인 깊이를 잘 말해준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정영선 선생은 83세의 나이에도 새벽부터 정원으로 나가 식물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건네며 발길을 옮길 때마다 기쁨의 바이러스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듯하다. 그런 선생을 나는 ‘대지의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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