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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 희생자 후손들이 노예 착취자에게 보상하나”

, 이슈팀

입력 : 2024-04-21 22:00:00 수정 : 2024-04-21 1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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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이도스 정부, 노예 농장 후손 英 의원에 땅 매입 추진
국가 배상 TF “배상 문제 협상 중…상업거래 불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 정부가 현지 농장 소유 가문의 후손인 영국인으로부터 땅을 매입하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바베이도스가 과거 영국의 식민지 시절 노예 착취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지는 못할망정 돈을 주고 땅을 사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취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바베이도스 정부가 영국 보수당 리처드 드랙스 의원이 현지에 소유한 250헥타르 규모의 농장 가운데 21헥타르(축구장 15개 면적)를 매입해 주택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입 금액은 320만 파운드(약 51억원)로 추산된다. 드랙스 의원은 부친으로부터 바베이도스 농장을 상속받았다. 드랙스 의원은 영국 의회에서 가장 부유한 의원 중 한 명으로 그의 재산은 최소 1억5000만 파운드(약 2500억원)로 알려졌다.

 

영국 보수당 리처드 드랙스 의원. AFP연합뉴스

바베이도스는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7∼19세기 흑인 노예들이 바베이도스로 대거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인구 약 30만명 중 90% 가량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다.

 

1966년 11월30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으나 영연방 국가로 남아 영국 여왕을 군주로 섬기다 2000년 전후부터 공화국 전환을 위한 논의가 이어졌다. 독립 55년 만인 2021년 11월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드랙스 가문 역시 17세기 바베이도스에 건너가 흑인 노예를 부리며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해 부를 쌓았다. 드랙스 가문은 자메이카에도 노예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가 18세기에 매각했고, 노예무역에 쓰인 배도 최소 두 척 갖고 있었다.

 

바베이도스 정부는 주택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토지 매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드와이트 서덜랜드 주택부 장관은 “시장 가치를 기준으로 한 매입 절차로, 토지소유주에게 보상하는 건 당연하다”며 “이 땅이 드랙스 씨의 소유지만, 이건 배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주택 사업일 뿐”이라고 말했다.

 

영국 식민 통치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이들은 당장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바베이도스 시인이자 해당 토지 인근에서 자란 에스터 필립스는 이 거래는 “말도 안 되는 행위”라며 “이는 희생자들의 후손이 노예를 부린 이의 후손에게 보상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바베이도스 국가 배상 태스크포스 위원장인 트레버 프레스코드 의원도 “노예제는 반인륜적 범죄로, 정부는 이 땅에 한 푼도 지불해서는 안 된다”며 “이 문제는 바베이도스뿐만 아니라 카리브해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정부에 “우리가 그와 배상 문제로 협상 중인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상업적) 거래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드랙스 의원은 이와 관련한 가디언의 논평 요청을 거부했다. 과거 그는 노예무역에서 자기 조상들이 한 역할에 대해 “깊이깊이 유감스럽다”면서도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오늘날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했다.


안경준 기자 eyewher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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