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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옛 목조건축물은 왜 빨리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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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01 23:33:49 수정 : 2024-04-01 23: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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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광한루·경복궁 근정전 등
가을에 벌목해 이듬해 바로 써
나무 너무 마르면 손질 어렵고
농사·안전 문제로 초고속 건축

얼마 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최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 용문사 은행나무의 수령이 1018년이라고 밝혔다. 나무의 높이, 둘레, 부피, 무게, 탄소 저장량 등 나무의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전환하는 라이다(LiDAR) 기술을 이용해 용문사 은행나무와 똑같은 디지털 쌍둥이 나무를 구현해 이를 조사했다고 한다. 디지털 트윈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실제와 동일한 3차원 모델을 만들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현실 세계와 가상의 디지털 세계를 연결한다. 나무의 수령은 나이테를 봐야 알 수 있으나, 살아 있는 나무를 자를 수는 없어 지금까지 용문사 은행나무의 수령은 구전(口傳)이나 역사 기록을 통해 1100∼1500년으로 추정되어 왔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나이를 연구하는 것이 살아 있는 나무에 대한 것이라면, 죽은 나무 즉 목재의 벌채 시기를 밝히는 기술도 있다. 목재연륜연대법 혹은 나이테연륜연대법이라 불리는 이 기술을 이용하면 건축물에 사용된 목재가 언제 벌목되었는지 밝힐 수 있다. 특정 건축물에 사용된 목재가 언제 벌채되었는지 알 수 있으면 당시의 건축술과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목재연륜연대법에 의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조 4년(1626)에 중건된 남원 광한루에 사용된 목재는 1625년 겨울에서 1626년 봄 사이에 벌채되었다. 정조 18년(1794)에 완공된 수원 화성의 팔달문에 사용된 목재는 1793년 가을에 벌목되었다. 이 두 사례를 통해 옛날에는 가을에서 이른 봄 사이에 나무를 잘라 이듬해 날이 풀리면 바로 집을 지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중건 당시 중건을 위한 한시 조직인 경복궁영건도감에서 작성한 공사일지인 ‘경복궁 영건일감’에 의하면, 고종 3년(1866) 5월 말까지 근정전에 쓰일 대량과 고주 등 큰 재목을 못 구해 애를 태웠다. 그런데, 고종 4년(1867) 1월 근정전 기둥을 세웠고 2월에는 목구조의 맨 위에 올라가는 종보를 걸어 상량식을 했다. 이 기록을 통해 근정전 공사에서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나무를 벌목해 이듬해 1월 바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 건축을 하나의 경제 활동으로 볼 때 공사 기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요즘 건설회사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기를 단축할 수 있는 공정 관리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공기를 줄이면 인건비, 각종 임대 및 임차료, 금융 비용 등을 낮출 수 있어 공사 원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은 달라도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백성들에게 공역(工役)을 부과했기에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농사에 지장이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 국가 경제의 근간은 농업이었기에 이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각종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에는 항상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태조실록’ 4년의 기록에 따르면, 경복궁을 조성할 당시 대사헌 박경 등은 상소를 올려, 궁궐 공사에는 수만 명의 장인과 노동자가 필요한데 농민으로 그 수를 다 채우면 반드시 농사의 시기를 놓칠 것이라면서 승려를 동원할 것을 건의했다. 또 ‘경복궁 영건일감’에 의하면, 경복궁 중건 때에도 농번기에는 백성들로부터 동원한 단구거(소나 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를 모두 돌려보내 농사일을 돕게 하고 가을 추수 때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았다.

또 하나, 공기를 단축해야 하는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건축물이 완성되면 구조적으로 안정되지만, 시공 중에는 취약해 비바람에 붕괴할 수도 있다. 공기가 늘어나면 그만큼 위험성도 높아진다. 공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비계(예전에는 부계목이라 했다) 등의 가설물을 설치해야 한다. 요즘은 내구성이 높은 철 구조물로 비계를 만들지만, 예전에는 내구성이 낮은 칡넝쿨이나 새끼 등으로 목재나 대나무를 엮어 부계목을 만들었기에 공기가 길어지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예전의 공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주합루는 언덕배기에 우뚝 솟은 2층 누각으로 규모나 장소로 보아 결코 쉽지 않는 공사였으나 단 6개월 만에 공사를 끝냈다. 정조는 즉위년인 1776년 3월 주합루 공사를 명하고 9월에 낙성식을 가졌으니 요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복궁 중건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종 2년(1865) 4월2일 경복궁을 중건하라는 대왕대비의 교지가 있고 난 뒤, 4월3일 공사를 담당할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4월13일 공사를 시작하는 시역일로 잡았다. 이후 7000칸이 넘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은 고종 4년 12월까지 대부분 완공되었다. 1990년부터 2011년까지 20년 이상 복원한 경복궁이 복원 전부터 있었던 근정전, 경회루, 수정전,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등 기존 전각과 문을 포함해 대략 50%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고종 때의 중건 속도는 가히 빛의 속도였다.

숭례문 복구 후 부실 복구 논란이 한창일 때 덜 마른 목재를 사용했다는 질타가 있었다. 숭례문에 사용된 목재는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삼척 준경묘에서 벌채해 약 3년 정도 자연 건조한 후 사용했다. 어떤 사람은 최소한 7년은 건조해야 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3년 동안 건조한 숭례문 목재는 옛날 기준으로 보면 ‘너무 마른’ 목재였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들 말에 따르면, 벌채한 지 오래된 나무는 너무 단단해 손 연장으로 가공하기 쉽지 않다. 옛사람들이 나무를 잘라 바로 사용했을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옛 건축에 대한 판단은 지금이 아니라 옛사람의 관점이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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