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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과 바둑, 그리고 바둑학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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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8 16:39:30 수정 : 2024-03-31 10: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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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 국무총리가 명지대 총장으로 일하던 1996년 초의 일이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이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던 때다. 고건과 만난 YS는 대뜸 “고 총장이 전국구(현 비례대표) 상위 순번으로 들어와서 나하고 정치를 같이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YS가 총재로 있던 신한국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되라는 제안이었다. 고건은 거절했다. “사립대 총장도 공인이라면 공인”이라며 “(명지대) 학생회와 교수, 학교 간부들에게 ‘약속한 일을 마치기 전에는 정계에 안 나간다’고 공언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YS는 흔쾌히 동의하고 고건 영입을 포기헸다. 고건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둑판과 흑백의 바둑알. 게티이미지 제공

이듬해인 1997년 명지대는 국내, 아니 세계 대학에 유일한 바둑학과를 신설한다. 바둑에 심취한 고건의 결단이었다. 만약 고건이 YS의 권유를 선뜻 받아들였다면 바둑학과는 생겨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처음엔 ‘체육학부 바둑지도학 전공’으로 출발해 1998년 바둑학과로 독립했다. 고건은 자신이 바둑학과 신설을 주도한 점을 강조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서 바둑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높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7년간 명지대 바둑학과는 프로 기사만 80명가량 배출했고, 이들의 단수를 더하면 무려 400단에 가깝다.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 브라질 등에서도 유학생이 올 정도로 이름이 제법 알려졌다.

 

바둑은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남녀 단체전 그리고 혼성 페어 부문에서 경합을 펼친 끝에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 3개를 싹쓸이했다. 이후 13년 만인 2023년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부활했다. 이번에는 혼성 페어를 없애고 대신 남자 개인전을 추가했다. 한국 대표팀은 남자 단체전 금메달, 여자 단체전 은메달, 남자 개인전 동메달을 각각 따며 선전했다. 가히 ‘효자 종목’이라고 부를 만하다. 최근에는 신진서 9단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한국팀의 4연속 우승을 견인했다. 막판 끝내기 6연승으로 ‘세계 바둑 역사를 새로 썼다’는 찬사도 받았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명지대 총장 시절 세계 대학 유일의 바둑학과를 개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1997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돼 취임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명지대 바둑학과가 창설 27년 만에 폐과(廢科) 수순에 들어갔다. 2025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바둑 인구 자체가 줄어들고 바둑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내세웠다. 재학생들의 반발과 대한바둑협회의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려진 결정을 번복하긴 어려워 보인다. 누구보다 아쉬워 할 고건이 회고록 가운데 ‘바둑과 정치’ 챕터에 적은 문구가 떠오른다. “바둑에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는 게 있다. 내 말이 먼저 살고 그 다음에 남의 말을 잡으라는 뜻이다. 내 잘못부터 반성한 다음에 남을 비판해야 한다는 경구다.” ‘내로남불’이란 지적을 듣는 4·10 총선 후보들이 새겨들어야 할 고언이 아닐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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