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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정원 최고의 책, 혼자 알기 아까워…'한국식' 정원 기대" [박진영의 뉴스 속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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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1-09 10:28:30 수정 : 2024-01-10 1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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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 역자
김동훈 헌법재판소 공보관 인터뷰
“아름다운 정원, 행복해질 수 있어”

“처음엔 번역까지 할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서양 정원에 관한 최고의 책을 저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엔 급기야 사명감으로까지 발전했지요. 반드시 좋은 번역을 해서, 공부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알려 우리 정원 문화 발전에 기여하리라 하는 거창한 생각이었던 것이죠.”

 

김동훈(47·사법연수원 36기)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겸 공보관은 지난 5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나아가 서양 정원 안내서인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글항아리)을 번역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소설 ‘순수의 시대’ 미국 작가 이디스 워턴(1862∼1937)이 쓴 이 책은 그의 손끝을 거쳐 1904년 출간 120년 만에 국내에 소개됐다.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 역자인 김동훈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겸 공보관의 2016년 이탈리아 유학 시절 모습. 김 공보관 뒤로 이탈리아 빌라가 보인다. 김동훈 제공

김 공보관은 결혼 후 텃밭과 정원을 가꾸며 특색 있는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이는 정원 공부로 이어졌다. 웬만한 책은 다 읽었는데도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다 2015∼2016년 이탈리아 로마 유학 시절,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의 첫 문장을 본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다고 한다. 김 공보관은 “‘이탈리아 정원에는 꽃이 없다고 하면 과장이리라’는 오직 대가만이 쓸 수 있는 첫 문장”이라고 했다.

 

번역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돼서다. 번역 과정은 지난했다.

 

“누구나 번역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아직 번역되지 않았을까 궁금했어요. 그 이유는 대충 읽어 보는 단계를 넘어 본격적으로 번역하며 알게 됐습니다. 일단 영어를 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이탈리아어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이탈리아 정원들을 직접 가 보고, 정원을 가꿔 본 경험이 있어야만 제대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번역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워턴의 발자취를 따라 이탈리아 빌라와 정원 50여곳 중 3분의 1 정도를 답사했다. 로마에 1년 반 있는 동안 틈틈이 찾았다. 2022년엔 정원 기행을 했다. 책 표지뿐 아니라 책 속 사진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직접 찍은 것이다.

 

김 공보관은 수준급 실력에 대해 “사진을 배운 적 없고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것일 뿐”이라며 “적어도 구도는 잘 갖추고 핵심과 특징을 잡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정원 기행 중 아쉬운 일도 있었다.

 

“피렌체 인근의 ‘빌라 페트라이아’는 제가 사진을 찍어 책에 실은 ‘빌라 카스텔로’ 바로 옆에 있어요. 정작 그 입구를 찾아 헤매다 포기했습니다. 이탈리아 자유 여행을 해 본 분은 이해하실 거예요. 하지만 그다음 빌라에서 혼자 보낸 시간이 길어져 이탈리아 정원의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제대로 느낄 수 있었죠.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김 공보관은 또 “안 가 본 곳은 상상이 잘 안 돼 번역이 힘들었다”면서도 “다행히 지금은 인터넷 시대라, 구글 지도를 수없이 돌려보며 책에 묘사된 장면을 확인했다”고 했다.

 

여기에 초판본까지 구했다. 출판사 측에서 원서의 맥스필드 패리시 그림을 제대로 싣기 위해선 원서를 구해 스캔하면 좋겠다고 제안한 뒤, 해외 중고 서점에서 수천 달러를 호가하는 초판 양장본을 운 좋게도 약 50만원에 입수했다.

 

김 공보관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가 천병희(1939∼2022)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번역도 창작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우리말로 읽는 게 10배는 더 효율적이다”는 것.

 

‘빌라 란테’와 ‘빌라 파르네세’, 김 공보관이 말하는 이탈리아 빌라와 정원의 정수다. 그는 “로마 북쪽으로 고대 로마의 길을 따라 난 현대의 2차선 도로를 달리면 1시간 만에 도착하는 곳인데, 작은 마을 뒤편에 있다”며 “이탈리아의 숨은 매력인 소도시 분위기도 잘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 역자인 김동훈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겸 공보관이 2016년 이탈리아 유학 시절 딸과 찍은 사진. 김동훈 제공

이탈리아 빌라와 정원이 수백년 시간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잘 보존돼 있는 건 책만 봐도 알 수 있다. 김 공보관은 “너무나 부러운 부분”이라며 그 비결로 이탈리아인들의 역사와 전통 존중을 꼽았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후예로서 모든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는 자부심도 엄청나지요. 그래서 새것이나 근본 없는 건 일단 낮춰 봅니다. 빌라와 정원도 마찬가지지요. 당연히 조상이 물려준 것을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취향의 변화에 따라 변형을 가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존중이 깔려 있습니다. 1981년 국제역사정원위원회의 ‘역사 정원에 관한 헌장’(플로렌스 헌장)도 서양 정원이 시작된 피렌체에서 만들어졌지요. 역사와 정원의 특질이 잘 보존된 정원을 ‘역사 정원’이라 하고, 보존·복원 방법 등이 상세히 쓰여 있어요.”

 

김 공보관은 “주변이 아름다워지면 우리 마음도 여유롭고 풍요로워질 것”이라며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아름다움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고,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좋은 길이 정원을 즐기는 것”이란 지론을 폈다. 이어 “정원에 있다는 그 자체로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 마음은 고양된다”면서 한창호 영화 평론가가 쓴 ‘트립 투 이탈리아’의 한 구절을 언급했다. 이탈리아 귀족들이 건축가에게 건축을 의뢰할 때 “(자신에게는) 고향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우리 모두에겐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김 공보관은 같은 맥락에서 “정신을 더 고요하고 편안히 만들어 주는 공원과 정원, 조경이 있으면 좋겠다”며 ‘한국식’ 정원과 조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주위엔 나름대로 열심히 꾸며 놓은 공원과 광장이 있지만 마음 둘 곳이 없다고 느낀다”, “우리에겐 정원이 별로 없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 이유로는 세 가지를 들었다. 우선 이탈리아 부자들이 빌라를 지을 만큼의 부가 우리에겐 없었다는 것. 둘째는 ‘유교적 금욕주의’다.

 

“조선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왕이 창경궁 한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구리 통으로 만들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합니다. 왕이 검소한 모범을 보여야지 안 그러면 백성들이 사치에 빠진다는 겁니다. 결국 왕도 포기했지요. 금욕주의를 보여 주는 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꾸미고 즐기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즉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는 “과거 우리는 도시화가 안 된 한편, 나가면 바로 자연과 전원이 있기 때문에 굳이 정원을 가꿀 필요가 적었을 것”이라면서 “물론 지금은 그 자연과 전원이 다 망가졌다”고 지적했다.

 

김 공보관이 생각하는 한국식 정원이란 무엇일까. 그는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 만들었다고 다 한국 정원이 아니다”며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원주택 마당에 까는 초록 잔디밭은 과연 우리의 정원 모습일까요? 아파트 단지에 흔히 보이는 가지런하고 둥글게 깎아 놓은 철쭉이나 회양목은 우리 것일까요? 우리 전통 정원에 원래 없던 것이니, 배척하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적어도 그게 어디서 왔는지는 알아야만 그것을 활용할 때 우리 것다운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누가 봐도 한국적이면서 누구에게나 확연히 아름다운’ 한국식 정원이 언젠가 탄생하기를 기대합니다.”

 

김 공보관은 “정원도 공부가 필요하다”며 “그냥 보기 좋다고 아무 꽃나무나 심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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