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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잠 못드는 아이에게
오빠가 들려주던 이야기 귓가에
따뜻한 온도를 가진 이야기들
계속 번지고 남아 삶의 용기 줘

비가 내려서 감잎이 무겁게 떨어지는 아침이었다. 전화기 속 아이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레미콘 차량이 들락거리는 공사 현장의 여성 신호수가, 통행을 제지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이거 말고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뭉클해진 아이가 이 감동을 함께 나누겠다며 전화한 것이다. 오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던 아이에게 이 말이 큰 격려가 된 모양이다. 따뜻한 온도를 가진 이야기는 이렇게 번지고 또 남는다.

철학자인 고(故) 김진영 선생은 참 다정한 이야기꾼이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매체를 통해 들었던 그분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그가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대화 모임을 했는데, 유년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유년에 대한 글쓰기를 ‘마음의 원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유서 쓰기’로 여겼다. 임종의 침상은 미래가 없으므로 시간이 역류하여 유년으로 가기 때문이라는데, 그의 유년에는 세 아이가 있었다. 그것은 잠 못 드는 아이, 부르는 아이, 이야기꾼 아이였다.

천수호 시인

어린 진영은 잠 못 드는 밤이면 베개를 안고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빨리 잠재울 요량으로 부르는 아이 이야기를 한다. “네가 빨리 잠들지 않으면 어떤 아이가 대문 밖에서 너를 부를 거야. 세 번 부를 때까지 자지 않으면 너는 너도 모르게 그 애를 따라가서,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공포에 휩싸인 어린 진영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애가 부르기 전에 잠이 들었는지, 두 번 부를 때 아슬아슬하게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때 불려 나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나그네 삶을 살았는지.

김 선생이 떠난 지 벌써 5년이 지났고 다만 이야기만 남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유년에도 잠 못 드는 아이가 있었다. 딸 많은 집의 넷째 딸로 태어난 나는 희미한 존재감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을 혼자 견디는 아이였다. 그러나 예외의 밤이 있었다. 그건 세 살 위의 이종사촌 오빠가 오는 날이었다. 이 오빠는 이야기꾼의 면모를 타고났고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빠의 경주 지방어는 옛이야기를 더욱 맛깔스럽게 전해 주었지만 아쉽게도 그때의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빠가 졸음에 겨워서 더듬더듬해 주던 미완성 이야기 하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마 내가 일곱이나 여덟 살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여러 개의 이야기를 하고 지친 오빠가 졸음과 사투를 벌일 시간쯤이었다. 그런 오빠와 달리 모처럼 이야기꾼을 만난 어린 나는 더욱 초롱해져서 그다음 이야기를 종용했다.

착한 오빠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그마한 생쥐 한 마리가 큰 강을 건너고 있었어. 긴 꼬리를 강물에 담그고 퐁당퐁당, 강을 건너고 있었지….” 그러고는 오빠는 졸기 시작했다. 나는 큰 강을 머릿속에 그려 놓고 그 강물 한가운데 작은 쥐 한 마리가 긴 꼬리를 적시며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쥐는 그쯤에서 동작을 딱 멈추었고 나는 아주 소심하게 오빠를 흔들었다. 오빠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아직 퐁당퐁당 건너고 있어….” 그러고는 또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내가 건드릴 때마다 오빠는 “아직도 퐁당퐁당….”

나의 생쥐는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고, 그의 강은 점점 더 넓어졌다. 생쥐는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강을 다 건너지 못하고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다 건너지 못한들 어떠랴. 생각해 보면 생쥐인 내가 삶이라는 큰 강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앞에 큰 강 이야기를 풀어 준 그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유년의 이야기는 언젠가 내게 시간이 역류할 때 다시 쓰게 될 마음의 원전이겠다. 이렇듯 나에게도 다만 이야기만 남았다. “주인도 노예도 다 죽었고,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책 속에, 영화 속에, 머릿속에.” (김상혁 시인의 ‘인간의 유산’ 중에서)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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