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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구 ‘암각화 또는 사진’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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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1-23 15:39:07 수정 : 2023-11-23 15: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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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고래·생각하는 사람 ··· 바위에 저장한 선사시대 사진
강운구 ‘암각화 또는 사진’展 - 뮤지엄한미 삼청, 신작 150여 점

반구대엔 고래 등에 새끼 고래 새겨
어미는 음각 새끼는 양각 표현 파격적
카자흐서도 새끼 양각으로 새겨 넣어
선사시대 삶과 죽음 시각적으로 구분
‘수직’땅짐승 ‘수평’물짐승은 죽은 상태
8개국 30여개 암각화 지대 서사 담아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가 서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고래 등에 새겨진 새끼 고래는 실로 대단하다. 어미 고래가 등에 태우고 다니는 새끼라거나 고래 배 속의 새끼라는 설이 있다.

 

암각화는 대부분 바위를 쪼거나 갈아서 낸 선 또는 면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음각이다. 선사시대 거의 모든 암각화는 파인 음각이다. 그런데 반구대의 고래새끼는 음각으로 새겨진 어미 고래 속에 돋을새김(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다. 어미 고래의 몸을 파내면서 새끼를 튀어나 보이도록 남겨 둔 것이다. 일반적인 수법으로 새기자면, 파인 어미의 몸을 더 파서 새끼를 새겨야 마땅했다.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음각된 고래 등에 뭔가를 또 음각으로 파낸 작품이 있다. 이중음각이다. 이 같은 수법이 당시의 상식이었을 테다.     

 

일명 ‘생각하는 사람’. 반구대 암각화 서 있는 고래들 위에 머리를 싸매고 선,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그림. 무리의 우두머리로 추정된다. 뮤지엄한미 제공

날카로운 작살을 맞은 고래도 보인다. 끈 없는 작살은 선명한 양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양각들은 반구대 암각화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독창성과 표현수법을 보여준다. 암각화의 보편성(일반적 두뇌)을 뛰어넘는 대단한 발상이다. 어느 천재가 이루어낸 작품이다. 

 

카자흐스탄 탐블르이 암각화에도 배 속의 새끼가 양각으로 새겨진 작품이 있다. 새끼는 멋지고도 과장된 뿔을 가졌다. 송아지에겐 뿔이 없다는 것을 그때 사람들도 알았을 테지만 어떤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 있는 고래들과 함께 양각된 고래 새끼, 작살이 인상 깊다. 가장 뛰어난 독창성과 표현수법을 보여준다. 뮤지엄한미 제공

빙하기가 끝나고 홀로세에 들어 기후가 온화해지자 호모사피엔스의 구석기시대는 신석기시대로 비약한다. 인류는 동굴에서 밖으로 나와 바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바위는 현대 하드디스크보다 내구성이 좋은 기록장치다. 노천에서 비바람 맞으며 5000여 년을 버텨왔으니. 

 

바위 표면이 수천년 동안 공기와 빛, 비나 눈과 접촉하면 표면의 광물질들이 배어 나와 녹슬게 된다. 이를 ‘파티나(patina)’라 한다. 바위가 함유한 광물에 따라 파티나는 각각 다른 빛깔로 나타난다. 반구대는 붉은색이지만 중앙아시아 전역 대다수는 검은 빛깔을 띤다. 바위 표면의 망간이 산화되어 검은 파티나가 된 예는 흔하다. 따라서 색을 띠는 표면에 새긴 그림의 선은 그 바위의 본디 밝은 속살을 드러낸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파티나가 있는 바위들을 기어코 찾아냈다. 중앙아시아 암각화 가운데 파티나 없는 바위에 새긴 그림은 없다. 파티나가 낀 안전지대에는 어디나 암각화로 뒤덮였다.

 

암각화는 우두머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릴 수 있었다. 그래서 직접 관찰한 대로 그리기보다는 천재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주관적 느낌을 과장해 남겨놓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모이나크 맞은편에는 어린이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 그림이 있다. 서툰 솜씨이지만 뿔을 과장해 그리는 당대의 트렌드를 알고 있었다.

 

카자흐스탄 탐블르이 암각화. 바위에 새겼지만 생동감이 느껴진다. 5000여 점의 암각화가 있는 이곳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뮤지엄한미 제공

암각화 속 사람들은 짐승에 견주어 왜소하다. 고래에 비해 고래 잡는 배는 아주 작으며 거기에 탄 사람들의 머리는 단 한 차례 쪼은 점에 불과하다. 반구대 암각화만 그런 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그 밖 몇몇 나라의 암각화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아마도 짐승은 강한데 사람은 약하고 보잘것없다는 당시의 인식 때문일 듯하다. 그때도 모자를 쓰거나 짐승처럼 긴 꼬리를 달고 다니는 ‘유행’이 있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는 인식체계를 가졌다. 네발짐승이 수직으로 서서 허공에 발을 뻗고 있는 모습은 죽은 상태다. 땅에 발을 딛고 서지 않은 모습이다. 반면 작살을 맞은 고래는 수직 자세로 유영해 나간다. 작살을 맞았지만 끈이 떨어져서 살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커도 수평자세로 누운 고래는 죽은 모습이다. 이들은 육지 네발짐승과 해양 생물의 죽음을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 적용했다.

 

반구대 암각화 고래들 위로 가장 높은 곳에 한 사람이 머리를 감싸 쥐고 서 있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일명 ‘생각하는 사람’. 이처럼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는 암각화는 어느 곳에도 없다. 그는 어떤 언어로 사고하고 있었을까. 

 

우즈베키스탄 사르미시사이 암각화, 소를 크게 그린 것들이 많은데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뮤지엄한미 제공

한복판 맨 위 중심 위치에 암각화를 새긴 이는 무리의 샤먼(무당)이나 우두머리를 겸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암각화의 불멸성을 예측했을 터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인식한 삶과 죽음의 표현을 반만년 넘게 길이 남긴 이유다. 선사시대 각 지역의 천재들이 바위에 저장한 암각화는 그 시대의 사진이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척자이자 모더니즘 사진을 대변하는 작가 강운구가 내년 3월17일까지 서울 종로구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암각화 또는 사진’이란 주제를 내걸고 신작 150여 점을 선보인다. 멀고도 먼 곳, 광활하고 황량한 초원, 골짜기와 등성이를 더듬고 다닌 끝에, 5000∼6000년 전의 사람들을 만난 그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왔다.

 

‘파티나’가 잘 형성된 바위에 신석기시대 소 그림이 있고, 맨 아래 청동기시대 ‘춤추는 사람’이 선대의 그림을 침범해 새겨져 있다. 뮤지엄한미 제공

그는 1960년대 개발독재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는 한국 사회의 국면들을 끊임없이 기록해온 작가다. 수입 사진 이론의 잣대를 걷어내고 우리 시각언어로 포토저널리즘과 작가주의 영상을 개척해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긴다”는 평을 받았다.

 

주로 사람, 그리고 사람이 사는 방법과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는 강운구는 동시대, 같은 지역에 함께 사는 사람들을 기록하며 해석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는 파미르고원, 톈산산맥, 알타이산맥에 걸쳐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과 러시아, 몽골, 중국 그리고 한국 등 총 8개국 30여 개 암각화 지대를 답사했다. 선사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포착해낸 작가는 고대인들의 삶과 의식을 유장한 서사로 풀어낸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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