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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쉼표] 없던 인간미가 생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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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1-17 22:43:17 수정 : 2023-11-17 22: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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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한 아이가 천연덕스럽게 말하기를, 깜빡하고 책가방을 교실에 두고 왔단다. 우산도 아니고 필통도 아니고 어떻게 책가방을 두고 올 수 있나. 더 어이없는 것은 어쩌면 가방을 교실 아닌 다른 곳에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아이의 뒷말이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어디 책가방뿐인가. 전에는 신고 갔던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리고 하교한 적도 있다. 우산이나 학용품같이 자잘한 소지품을 잃어버린 일은 부지기수라 일일이 논할 수도 없다.

처음에는 웃고 넘어갔다. 그다음에는 소지품을 잘 챙기고 다니라고 타일렀다. 그래도 같은 일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었다. 어떻게 책가방을 두고 올 수가 있어? 벌써 두 번째잖아. 한 번 실수했으면 더 조심해야지. 듣기 싫었는지 아이가 불쑥 볼멘소리를 했다. 난 아직 어리잖아. 그럼 엄마는 아홉 살 때 학교에 뭐 놓고 온 적 없어?

응. 없어. 생각하기 전에 대답부터 했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아도 대답은 같았다. 꼼꼼해서라기보다 워낙 소심하고 우유부단하여 매사에 오래 고민하고 느리게 움직인 탓에 실수할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이 소지품을 분실하는 일은 주로 술자리에서 생겼는데, 나는 술을 전혀 못하니 상대적으로 무엇인가를 잃거나 잊을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대학 시절 어느 소설책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조언하기를, 연애는 살면서 우산을 서너 개쯤 잃어버려 본 사람과 해라, 그보다 더 많이 잃어버렸다면 사람이 덤벙거려서 안 되고, 우산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인간미가 없어서 안 된다, 하는 대목을 읽고는 무슨 삶의 비의라도 엿본 듯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 자신을 인간미가 없는 사람으로 규정했던 기억이 났다. 책가방을 찾기 위해 학교로 향하면서 나는 아이에게 그 소설 속 우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간미가 뭔데? 아, 그럼 그거 없으면 나쁜 거네? 엄마 인간미 없으니까 나쁜 사람이다! 아이는 나를 놀려대며 즐거워했다.

책가방을 찾은 것은 교실도 아니고 복도도 아니고 방과후 실습실이었다. 문제는 문이 잠긴 것이었다. 방과후 실습이 끝난 지 몇 분 안 지났으니 선생님께 전화라도 드려보자 했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지. 엄마가 전화기를 집에 놓고 왔어. 아이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전화기 엄마 손에 있잖아! 엄마 인간미 엄청 많네. 다행이야.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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