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0월 호주군이 점령 작전에 투입
전사 20명·부상 89명… 끝까지 싸워 승리
“아마도 6·25전쟁 중 호주군의 단일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일 것이다.”
호주 전쟁사학자 로버트 오닐이 마량산 전투에 관해 남긴 발언이다. 경기 연천군의 북측 비무장지역(DMZ) 안에 자리한 해발 315m의 마량산은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군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점령했으나 결국 중공군에 빼앗겨 안타깝게도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마량산 전투 그리고 호주군의 활약상에 관해 소개했다. 유엔사는 “마량산 전투는 1951년 10월 3일에 시작되어 오늘(8일) 종료되었다”며 “유엔군 영연방 부대는 임진강 이북의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 특히 마량산으로 알려진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배치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호주 육군 프랜시스 하셋 중령의 지휘 아래 호주 왕립 제3연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수 차례에 걸친 반격을 필사적인 전투 끝에 격퇴했다”고 덧붙였다.
유엔사 설명대로 마량산은 임진강 일대 저지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그 때문에 북한 편에서 참전한 중공군 제64군이 마량산 일대에 배치돼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미군 등 유엔군 입장에선 이 마량산을 빼앗고 싶어도 임진강을 건넌 뒤 ‘배수진’을 쳐야 하는 지형적 악조건 탓에 공세를 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51년 10월 3일 호주군이 마량산 전투에 투입됐다. 안작(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이라는 이름 아래 호주군과 함께하는 뉴질랜드군 16포병연대가 지원사격을 맡았다. 전투 기간 마량산에 쏟아부은 아군의 포탄만 7만2000발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는 뉴질랜드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래 가장 많은 포탄을 쓴 기록에 해당한다.
호주군은 전사 20명, 부상 89명 등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마량산 점령에 성공했다. 주변 관측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달 뒤인 11월 5일 중공군이 1만여발의 포격을 앞세워 다시 공격을 가함에 따라 병력 및 화력 면에서 열세였던 유엔군은 마량산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오늘날 마량산에서 가까운 우리 육군 부대 안에 ‘태풍전망대’라는 곳이 있다. 이 전망대에 오르면 마량산을 비롯해 북한 땅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6·25전쟁 당시 마량산을 점령한 호주군의 활약상을 기리고 그 과정에서 치른 희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는 곳 역시 태풍전망대다. 전망대와 함께 있는 안보공원에는 호주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호주군이 마량산 일대에서 1951년 10월 3일부터 전투를 벌여 고지를 탈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국군의 한 관계자는 “호주군은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마량산 전투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했다”며 “우리나라가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운 순간에 곁을 지켜준 호주 참전용사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주는 6·25전쟁 당시 미국, 캐나다, 태국과 더불어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한 4개국 중 하나다. 전쟁 기간 연인원 1만7164명을 보내 한국을 도왔다. 그중 332명이 전사하고 1216명은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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