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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한켠 설치미술, 대관령선 행위예술… 작품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강릉 한바퀴

입력 : 2023-10-05 23:00:00 수정 : 2023-10-05 21: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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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까지 강릉 일대서 국제아트페스티벌
홋부녀(제대로), 댕칸(뒷마당), 삼지거리(앞마당), 정지(부엌)…. 반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사투리가 섞인 설명이 작은 스피커를 타고 쉼 없이 흘러나온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동성 할아버지가 들려준, 어릴 적 동해안의 주문진 불당골 마을 오징어 덕장에서 일하던 이야기를 녹음한 것이다. 벽에는 그가 대충 그려놓은 당시 불당골 약도가 걸려 있다. 옆방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그림은 ‘검은 오징어’. 리어카 한가득 오징어를 바닥에 풀어놓으면 다듬는 동안 다리도 뜯어먹고, 긴 다리 두 개는 따로 떼어내 팔았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가 양자주가 그렸다.

 

강원도 강릉의 동부시장 2층 한쪽, 방 두 개를 온전히 차지한 설치미술 작품 ‘대화’다. 소리와 낙서, 그림, 그리고 이를 품고 있는 공간 모두가 하나의 작품으로, 불당골의 옛 모습에 관한 노인의 기억에 작가의 시선을 더한 작품이다. 불당골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밀집해 구릉지에 미로 형태 주거지를 형성한 곳이다. 콜탄으로 만들었다는 ‘골탕집’이 인상적이다. 불과 한 세대 차이일 뿐인데 소통이 어려울 만큼 삶과 문화가 달라졌다.

프란시스 알리스, ‘모래 위 선’ (2018-2020), 61분, 스틸컷

양자주는 회화, 설치를 비롯해 공공 예술프로젝트와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한다. 지나간 것들, 잊혀가는 것들을 소환하고 연결해 다시 소통하는 작업을 좋아한다. 특정 지역의 건축물에 스며들어 있는 독특한 지리적·역사적 배경을 연구하고, 이 과정에서 발굴, 채집한 시간의 흔적을 모아 재구성해낸다.

시장 곳곳에는 여러 작가의 작품이 배치됐다. 한 건설사가 식당 ‘함바집’으로 쓰던 곳에는 이우성 작가의 걸개그림이 내걸렸다. 자신의 사적인 순간이 그림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에 닿아 연결되기를 희망하는 작가는 만물상 같은 동부시장의 모습과 곳곳에 남아 있는 옛 간판을 보면서 느낀 애잔함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그림 옆 창문에는 과거 식당의 ‘해물탕’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홍순명, ‘서유록-홍씨 이야기-’ (2023) 97x130cm.

미술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강릉 곳곳을 둘러보게 되는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 2023)이 열리고 있다. 강릉에 본사를 둔 바이오제약사 파마리서치가 설립한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이 29일까지 진행하는 미술축제다. 강릉시립미술관, 국립대관령치유의숲,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동부시장 레인보우(233호), 옥천동 웨어하우스 등이 이번 페스티벌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다.

티노 세갈, 프란시스 알리스, 로사 바바,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카밀라 알베르티, 고등어, 박선민, 홍순명, 송신규, 임호경 등 다양한 국적과 연령대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국립대관령치유의숲에서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작가 흑표범도 눈에 띈다.

임호경, ‘길 떠나는 그림’ 중 일부.

영국 런던 출신의 티노 세갈은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여한 데 이어 제55회 때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는 특정 상황을 구축하고 현장에서 관람객이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과정과 행위를 작품으로 승화해 기존 예술 제작 방식의 관념을 깬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 ‘디스유(This You)’ 또한 작가가 직접 퍼포먼스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연출’할 뿐, 그가 고용한 인터프리터(해석자)가 미리 연습한 대로 상황을 구현한다. 평소 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남기지 않는 그의 작품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체험할 기회다.

벨기에 출신의 프란시스 알리스는 영화 ‘모래 위 선’(Sandlines, the Story of History)을 상영한다. 2020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 영상은 그가 2016년부터 이라크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 중 하나이자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지정학적 문제를 논하는 ‘어린이들의 게임(Children’s Game)’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라크 모술 지역의 작은 산간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이 이 지역 역사 속 다양한 국적과 종족의 인물을 역할극으로 재현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역사를 재해석한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체결한 불공정 협정인 사이크스-피코 조약부터 2016년 이슬람국가(IS)에 이르기까지 이라크 역사의 한 세기를 망라한 작품이다. 우리가 잘 몰랐던 중동의 상황과 입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지난 20여년 동안 남미와 북미, 중동 등 전 세계 지역공동체와 작업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자신만의 시적 표현과 상상력을 동원해 국가라는 공동체가 만든 경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경계 너머를 사유한다. 한국에서는 2018년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 ‘지브롤터 항해일지’를 열었다.

1950년대 양곡 창고로 만들어졌다가 공간 업사이클링을 통해 열린 공간으로 변신한 옥천동 웨어하우스에서는 문명과 자연, 안과 밖 등의 주제를 다루는 박선민의 신작 ‘귀와 눈: 노암’을 만날 수 있다. 1900년대 초 일본의 수탈을 위해 생겨나 6·25 때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비극의 장소 노암터널을 주목한다. 터널 양쪽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박선민, ‘귀와 눈 : 노암’ (2023) 24분.

홍순명은 자연 풍경과 유적지를 겹쳐 장소와 시간이 혼재하는 장면을 선사하는 ‘서유록-홍씨 여행기’로 강릉시립미술관 1층 벽면을 가득 채운다. 평소 사소하고 파편적인 사건들을 수집, 집적해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이미지보다 주변부에 집중하는 작가는 ‘서유록’을 남긴 강릉 김씨의 여정을 따라 ‘대관령 옛길’을 직접 걸으며 110여년 전 김씨가 마주한 풍경을 상상하고 근접한 풍경을 수집한다. 대관령 경관, 평창군 운교리, 진부면 모로재(모리재) 고개, 양평군 두물머리 등 여행기에 언급된 장소를 찾아가 한 화면에 겹쳐 표현한 상상 속 풍경화를 보여준다.

임호경은 이번 페스티벌에 신작 ‘탄소 나무’를 들고나왔다. 다른 속성의 두 개체가 공존하는 이미지를 탐구하는 작가는 과거 인류가 동굴에서 탄 나무와 재로 그림을 그리고 생활했듯이 생과 소멸의 세계가 사실은 연결되는지 질문을 던진다. 또한 강릉시립미술관과 동부시장 레인보우(233호) 두 공간에 걸려 있는 그림을 관람객이 직접 옮겨볼 수 있도록 권유하는 참여형 작품 ‘길 떠나는 그림’을 함께 진행한다.

 

그는 “같은 그림이 여기 걸려 있을 때와 저기 걸려 있을 때, 다른 느낌을 주는데 그림을 다른 공간에 옮겨 거는 행위 자체가 나의 작품에 속한다”고 말한다. 영정사진을 들고 가는 데서 착안했다.

 

전시 외에도 ‘다크 둠 허니’ ‘PARADOX MOTION’(패러독스 모션) 등의 공연을 창작하고, 영화 ‘나는 보리’에 의사 역으로 출연했는가 하면 시집 ‘강릉호시절’을 출간했다. 현재 MBC FM강원 ‘오후의 발견’에서 ‘임호경의 호시탐탐 작업실’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 고등어는 영상,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로 강릉의 옛이야기와 이곳에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담아낸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바다 건너 먼 곳을 찾아온 이주민들의 행보를 따라가며 그들의 언어로 된 네 가지 글귀를 동부시장 내부와 옥천동 웨어하우스 담벼락 등에 남긴다.


강릉=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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