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서 출발한 학자의 이론처럼
고통도 당당히 맞서면 신성해져
환한 달빛에 마음이 정화되기를
추석이 다가온다. 둥글고 둥근 보름달이 뜰 것이다. 추석은 농경사회의 산물, 농경사회의 꽃이다. 추수를 끝내고 여유가 생긴 조상들은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수확한 것 중에 최초의 것, 최고의 것을 골라 제물로 삼고, 달빛 따라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이를 추억했을 것이다. 어제 살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살고, 오늘 우리가 살았던 것처럼 내일 우리의 아이들이 살던 시간엔, 계절이 돌고 돌 듯 삶의 방식도 돌고 돌았다. 그때는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영원회귀의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살다 가는 인생, 또 계절이 돌아오듯 돌고 도는 인생, 자연스럽게 돌아가기를! 그 인생관에선 산 자와 죽은 자를 차별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힘과 죽을 수 있는 힘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가을의 ‘추수’가 중요한 농경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조상들이 살았던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가 살았던 방식으로 자녀들이 살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보름달은 회귀한다. 이번 추석에도 보름달이 뜨기를, 둥글게 빛나기를 기원해 본다.
살아볼수록 인생은 여행이다. 어디서 왔을까, 어디로 갈까, 알 수는 없어도 분명한 것은 재벌에서 노숙자까지 그 누구도 이 지구별이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영적 휴머니즘’으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세상을 떴다. 그는 모든 종교가 궁극에선 만난다고 믿은 종교다원주의자였다.
철학자 정대현 교수는 그를 추모하며 그의 사유를 신인합일(神人合一)로 요약했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된 성육신 사건인데, 길희성은 예수를 공부하며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으로 종교 사이의 벽을 해체하는 방법론적 열쇠를 찾았다는 것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우리 안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 신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휴머니즘의 핵이다. 그 신성을 ‘하느님’이라 하든, ‘불성’이라 하든, ‘태극’이라 하든, ‘아트만’이라 하든, 그건 단지 언어적 차이일 뿐 궁극의 차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를 묻기 위해 파둔 한줌의 공간을 보았을 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인생, 덧없다는 것을. 이 땅은 정착지가 아니라 배움터라는 것을. 고인이 소개될 때마다 종종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하버드 출신의 종교학자, 그렇게 요약된 것은 그에게 기대된 사회적 역할이지만, 그러나 한 줄로 요약되어 유통되는 것이 어찌 그 사람의 인생일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통령으로 살든 거지로 살든, 학자로 살든 농부로 살든 그것은 껍질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고인은 불교의 ‘무상(無常)’을 자유의 표상으로 보았다. “존재는 슬픔을 가진다. 왜냐하면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이다.” 집착한 것에서 무상을 보고 툭, 놓을 수 있을 때 자유가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고통은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일 수 있다. 고통이 회피되어야 할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마주쳐 스승으로 삼아야 할 몽학선생이 되면 고통까지도 신성한 것이 된다. 당당히 고통을 마주하고, 거기에 실체가 없음을 봐야 지나간 것을 불러내 온갖 망상을 만들어내지 않고, 다가올 것에 불안해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대, 요리할 때는 요리에 몰두하고, 산책할 때는 발걸음에 집중하고, 사랑할 때는 사랑만 하고, 일을 할 때는 일만 할 수 있는가. 외로울 때는 외로움을 만져보고, 맨발걷기를 할 때는 맨발의 촉감을 섬세하게 느껴봐야겠다. 많이 웃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해야겠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고 달맞이꽃이 달빛을 충분히 느끼듯 그렇게. 그러면 요리가, 산책이, 사랑이 신성한 일이 된다. 이번 추석엔 달맞이꽃이 달의 정기를 모으듯 우리의 호흡이 달빛 따라 달에 닿기를. 그 달빛에 정화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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