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식량 등 유행하는 담론 벗어나
정신·감각 지배하는 고유 특성 다뤄
10개 소주제로 ‘사진적인 사진’ 소개
초대전 ‘대구사진사 시리즈’도 눈길
사진작가 마틴 로머스는 인도 뭄바이 등 인구 1000만을 넘는 거대 도시의 혼잡한 교통 상황을 즐겨 찍는다. 그는 긴 시간 카메라 노출을 통해 얼핏 보면 무질서하지만 실은 그 안에 매 순간 균형이 형성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장노출이 가능한 아날로그 카메라를 메고 높은 곳에 올라간 그는 물처럼 흐르고 실처럼 이어지는 도시의 에너지를 포착한다. 작품 ‘메트로폴리스’ 시리즈 속 사람과 자동차, 버스와 기차는 자신의 고유한 윤곽을 잃어버리고 색상의 흐름으로 변환된다. 피사체의 장시간 움직임을 기록하는 사진의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사진이 가진 ‘비포 앤 애프터’, 반복과 비교의 힘은 이리나 웨르닝의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2011년 시작한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에서 가족사진을 통해 사진의 고유한 힘을 구체화하고 있다. 다른 시간대에서 동일한 상황을 다시 촬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가족앨범에 보존되어 있던 유년기와 청년기의 사진을 고른 작가는 과거에 촬영됐던 인물들을 재소환해 10년 또는 30년 후의 모습으로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모습은 첫 사진과 연속성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옷과 액세서리를 걸친 채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사진들은 인간적인 감정들에 대한 온화한 시선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지나간 시간의 가시적 현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사진으로! 사진의 영원한 힘’이라는 주제를 내건 제9회 대구사진비엔날레가 22일부터 11월5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을 비롯해 동대구역 광장, 대구예술발전소, 경북대미술관, 인터불고호텔, 방천시장 등 대구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 행사의 특징은 환경, 기후, 소수자, 식량, 공존, 디아스포라 등 유행처럼 반복되는 담론에서 벗어나 날이 갈수록 인간의 정신과 감각을 장악하는 사진 매체의 고유한 특성과 힘을 다룬다는 것이다. 문학이나 음악 등 다른 분야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사진만이 표현해내는 ‘사진적인 사진’만을 소개한다.
마치 신체 일부처럼 되어 버린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그 이미지를 배포한다. 그렇게 생산된 사진은 복제와 재복제를 통해 무한 배포되며, 오늘날 인간의 시각 경험은 이러한 사진들로 형성된다. 실로 사진이 지배하는 환경이다. 그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점차 ‘사진 인간(포토 휴먼·photo human)’으로 변하고 있다. 사진 발명 이후의 인간은 시각 경험의 차원에서 사진 발명 이전의 인간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비엔날레는 ‘증언의 힘’, ‘순간포착의 힘’, ‘확대의 힘’, ‘변형의 힘’, ‘관계의 힘’ 등 10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사진 매체의 힘이 동시대 시각예술에서 어떤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특히 사진의 원초적인 힘과 에너지가 강력하게 드러나는 작품에 주목한다. ‘광학적 무의식’의 세계, 시공간적으로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지만, 카메라에는 포착되는 이미지를 선보인다. 눈에 겨우 보이는 작은 대상을 전시장 벽면 크기로 확대한 사진, 폭발하는 사물의 파편들을 순간 포착한 사진 등을 제시한다. 사진의 놀라운 마력(魔力), 에너지, 힘을 체험케 한다. 아울러 사진에 관한 근원적 질문인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할 기회를 안긴다. 이번 전시는 보는 전시이자, 동시에 ‘사유하는’ 전시다.
김규식의 ‘진자운동실험’ 연작은 레이저가 달린 긴 막대를 회전시켜 아래의 감광판(인화지 또는 필름)에 진자운동의 궤적을 기록한 사진이다. 빛을 포착하는 사진의 독특한 힘을 활용한, 사진의 근원에 매우 가까이 간 작품이다. 작가의 말처럼 ‘원초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놀라운 미적 쾌감을 유발한다. 수없이 회전하면서 빛으로 그려낸 이 신비로운 이미지는 우주 행성의 궤적, 혹은 우주가 폭발하는 태초의 순간을 형상화한다.

몸을 주제로 한 존 유이의 작품 ‘해변의 사람들’은 우연히 탄생했다.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를 놓자 근경에 있는 신체 부위와 원경의 해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됐다. 엉덩이와 허리의 ‘관능’이 다른 세상에 속해 있던 무료하고 무심한 젊은이들의 실루엣과 겹치면서 갑자기 적나라해졌다.
테리 와이펜박의 작품은 대부분 꽃, 수풀, 나무 등 자연을 매우 가까이에서 관찰한 것들이다. 그는 미국 워싱턴으로 이사한 뒤 뜰에 나무와 꽃을 심었다. 10년이 지난 2016년, 새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2년 동안 매일 새들을 관찰하며 사진에 담았다. 고속 셔터로 새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는데, 이때 새는 식별하기 힘든 대상으로 변한다. 순간포착은 새의 내밀한 동적 에너지를 드러낸다. 또한 장난기와 활기, 경쾌함이 넘치는, 그래서 보는 이에게 경이로움을 건네는 새의 모습을 보여 준다.

초대전인 ‘대구사진사 시리즈’에서는 광복과 전쟁을 거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진가, 사진단체, 사진사 연표를 활용해 대구사진의 힘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영아티스트 사진전, 프린지 포토페스티벌, 장롱 속 사진전 등 전문가와 아마추어 모두가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사진 강연 워크숍도 개최한다. 사진 탄생의 비밀, 시대별 사진 경향과 로드뷰 사진, 드론 사진, 인공지능(AI) 사진, 성형(成形)사진 등 날로 발전하는 사진의 첨단 기능도 소개한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