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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가, 집 도착하면 연락하고!”

최근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는 대개 이런 작별 인사로 끝난다. 그날 만남에 성급한 마침표를 찍기보다는 ‘귀가하는 순간까지 너의 안위를 신경쓰겠다’는 다짐에 가까운 말을 건네며 헤어지는 것이다. 잇따른 흉기난동부터 최근 등산로 성폭행·살인사건까지 일상에 급습한 죽음의 그림자가 모두를 불안에 떨게 하면서 만들어진 장면이다.

김나현 사회부 기자

이같이 시민 불안이 커지자 정부와 지자체는 앞다퉈 대책을 내놨다. 지난달 17일 서울 관악구 한 등산로에서 30대 여성이 무차별 폭행을 당한 후 사망하자, 관악구청은 사건 장소와 연결된 공원 입구에 ‘안전을 위하여 2인 이상 동반 산행’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 아래로는 ‘인적이 드문 샛길보다 이용객이 많은 정식 등산로(큰길)를 이용합시다’라는 문구도 기재됐다.

현수막 위로 정갈히 적힌 글자들을 읽은 순간 두 가지 감정이 솟구쳤다. 첫 번째는 불쾌감. 두 번째는 묘한 기시감. 피해자는 홀로 산길을 걸었기 때문에 숨진 게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샛길을 이용해서는 더더욱 아닐 터였다. 피의자 최윤종이 “강간하고 싶어서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듯, 그는 집을 나와 약 1시간을 걸으며 숱한 남성을 지나쳐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그렇게 도착한 등산로에서 한 여성을 사망할 때까지 때리고 성폭행을 저질렀다.

최윤종이 선택한 장소는 등산로였지만, 다른 성폭행·살인범도 마찬가지일까. 모를 일이다. 온라인상에서도 현수막의 문구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제 혼자 등산도 못 하나”, “큰길로 안 다녀서 죽었다는 건가”, “이게 제대로 된 안전 대책인가”. 잇단 의문 속 시원한 답은 없이 거북함만이 남았다.

뒤이어 찾아온 건 기시감. 분명 처음 본 현수막임에도 어디선가 익히 들어온 말들처럼 다가왔다. 현수막의 문장들은 기분 좋게 취한 채 오른 택시에서,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숱하게 들어본 말들과 닮아 있었다. “여자가 이렇게 늦은 밤 혼자 다녀도 되냐”라거나 “여자 혼자 여행에는 변수가 많지”와 같은 말들. 걱정하는 듯한 외피를 둘렀지만, 포장지를 까보면 나를 탓하고 찌르는 말들이었다.

“너무 짧은 치마는 입지 마!” 며칠 전 친구가 연인에게 들었다는 말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그러게 네가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라는 말과 활자는 다르지만 결은 같다. 결국 피해자가 조심했으면 됐다거나 여성들이 더 조신하면 된다는 시선이 담겨 있다.

피해자들이 몸을 사려서라도 정말 성폭행·스토킹·살인 등 각종 범죄가 예방된다면 한발 양보라도 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늘 정반대로 질주해 왔다. 공중화장실에 뚫려 있는 구멍들을 아무리 휴지로 막아봐도 불법촬영 사건들은 이제 너무 흔해 기사화도 잘 안 된다. 여성들이 아무리 꽁꽁 싸매고 일찍 귀가해도 엘리베이터에서, 1층 로비에서, 또는 직장에서 끌려가고 죽어간다.

다가오는 14일은 신당역 살인사건 1주기다. 피해자에게 손쉽게 돌아가는 눈길을 거두고 가해자들이 마음 놓고 활보한 우리 사회를 더 차갑게 찬찬히 뜯어보는 건 어떨까.


김나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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