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후손, 국회의장 지낸 이재형의 집
조선 한옥의 행랑채·사랑채·안채 갖춰
정치인 찾은 손님 자주 드나든 사랑채
손님맞이 편하도록 입식으로 개조해
건너편 ‘은밀한 공간’ 안채는 전통 고수
사이 마당의 정원이 ‘프라이버시’ 지켜
친구가 보내온 주소에는 굳게 닫힌 솟을대문이 서 있었다. ‘여기가 맞나’라는 생각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내인이 얼굴만 내민 채 문이 열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다시 들어갔다. 10여 분을 기다린 후 예약한 시간이 되자 정말(?) 문이 열렸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정해진 기간에만 일반에 공개되는 운경고택은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서울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 있는 집 같다.
운경고택은 사직단 남서쪽에 딱 붙어있다. 종묘와 함께 조선의 정신적 근간이었던 사직단 바로 옆에 있는 땅은 그 입지만으로도 왕조와 관련돼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 조선시대에 운경고택과 그 일대에는 도정궁(都正宮)이 있었다.

집 이름에 ‘궁(宮)’이 붙은 이유는 조선 제11대 왕이었던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세 번째 아들 하성군이 제14대 왕 선조로 즉위했다. 선조 재위 기간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었다. ‘도정(都正)’은 조선시대 종친과 외척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이다. 벼슬 이름이 집 이름에 붙은 이유는 선조 이후 그의 대를 이을 자손들에게 도정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왕들의 후손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특별한 혜택이었다. ‘도정궁’이라는 이름은 ‘대대로 도정들이 살던 집’이라는 뜻이다.
다른 궁들과 마찬가지로 도정궁도 조선시대 후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0년대 초 도정궁의 제13대 사손(嗣孫; 대를 이을 손자)이었던 경원군 이하전의 정치적 몰락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와 대립했던 이하전은 김순성과 이극선 등이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21세에 사약을 받았다. 물론, 혐의의 증좌는 발견되지 않았다.
쇠락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100칸 이상의 규모를 유지했던 도정궁은 1913년 겨울에 발생한 화재로 큰 피해를 보았다. 그리고 도시개발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훼철되었다. 이하전이 사용했던 경원당(慶原堂)도 1975년에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로 이전되었다. 운경고택은 1920~3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도정궁의 일부였을 수도 있고 도정궁에서 나뉜 필지에 다른 누군가가 신축했을 수도 있다.
1953년 이 집을 사들인 인물은 운경 이재형(1914~1992)이다. 선조의 후손이었던 이재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환지본처·還至本處)이었다. 이재형은 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일곱 차례 지냈고 한국전쟁 막바지에는 상공부 장관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제12대 국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덧붙이자면 이재형의 동생 이재준은 대림산업(현 DL그룹)의 창업주이고 그의 고향은 현재 산본신도시가 되었다.
운경고택은 행랑채-사랑채-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한옥의 전형적인 구성이지만 사실 서울에서 이런 구성을 갖춘 한옥을 찾기란 쉽지 않다. 1900년대 초반 도시한옥이 개발되면서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운경고택이 이러한 변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도시한옥이 들어선 북촌이나 서촌에 비해 개발이 어려운 지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솟을대문 양쪽에는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행랑채가 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문이 보인다. 왼쪽에 사랑채로 연결되는 문에는 ‘긍구당(肯構當)’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긍구(肯構)’는 ‘서경(書經)’의 ‘대고(大誥)’에 나오는 구절로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받으라’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서원이나 양반집에 자주 쓰이는 문구다.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문이 담벼락과 사랑채가 만나는 부분에 있다. 현판도 없어서 사랑채로 연결되는 문과 달리 존재감은 약하다. 그럼에도 사랑채의 지붕 아래 별도의 작은 지붕을 만든 처리는 눈여겨볼 만하다.
운경고택의 사랑채와 안채는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자와 ‘┌’자를 이루고 있다. 크기는 안채가 더 크지만 사랑채가 바깥에 있어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외부인들을 맞았던 사랑채는 남성들이 주로 사용했다. 친한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는 접객이 이루어졌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랑채에는 외부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오래되고 희귀한 예술품들이나 문방구가 진열돼 있었다.
운경고택의 사랑채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이재형을 만나러 온 정객들이었다.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손님의 수는 어마했을 것이다. 그래서 운경고택의 사랑채 중 일부는 손님들이 드나들기 편하도록 바닥에 마루를 깔고 창틀 높이를 의자에 맞춘 입식이다. 이 공간과 안쪽의 좌식으로 사용한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이 설치돼 있다. 미닫이문은 필요에 따라 두 공간을 나누기도 하고 통간(通間)으로 쓸 수 있게도 한다.
현대적인 요소가 섞인 사랑채와 달리 안채는 전통적인 한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남쪽을 향한 건물에는 대청마루가 있고 그 양쪽에 안방과 건넌방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기능들은 꺾여 있는 부분에 툇마루를 따라 배치돼 있다. 우물과 가까운 곳에는 나무널판으로 벽을 마감한 부엌이 있다. 지금은 현대식 주방으로 개조되었다.

다른 한옥에서 찾을 수 없는 운경고택만의 특징은 마당에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 한옥에서 마당은 빈 공간이다. 다양한 가사 활동이 일어나는 외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채광을 확보하고 바람이 통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러나 운경고택의 마당에는 작은 연못을 포함한 내정(內庭)이 조성돼 있다. 심지어 사랑방의 굴뚝도 설치돼 있다.
사랑채 구석에 앉아 안채와 내정을 바라보며 그 이유를 추측해 봤다. 운경고택의 마당이 일반적인 마당처럼 비어 있었다면 사랑채를 드나드는 외부인들에게 안채는 그대로 노출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안채의 기능과 사랑채의 역할은 공존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내정의 소나무와 붉은 영산홍 그리고 향긋한 라일락 때문에 사랑채를 찾은 손님들의 감각은 정원의 꽃과 나무로 향하게 되고 안채는 배경으로 흐릿해지면서 프라이버시가 지켜질 수 있었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안채를 나와 사랑채로 건너오는 운경의 모습이 내정을 배경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로 남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운경의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도 포개졌다. 사랑채의 구석자리는 두 채로 나뉜 운경고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위치였다. 그래서 난 ‘채나눔의 즐거움(喜)’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그 자리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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