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바다의 전설’ 시작 알려
6월24일(음력 5월7일) 오늘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의 관군이 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이 있었던 날이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의 승전을 시작으로, 거북선을 최초로 투입한 사천해전, 일본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게 한 한산도대첩 등에서 승전을 거듭하면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
이순신의 승전에는 무엇보다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지 여수에 도착한 이순신은 전쟁에 대비하여 군기물을 점검하고 부하들의 훈련을 적극 독려하였다. 거북선을 완성한 후에는 선상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시험발사하는 등 만일에 있을 전쟁에 대비해 나갔다. “동헌 뜰에 화대(火臺) 돌기둥을 세웠다”거나,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에 이르러 공사례(公私禮)를 마치고 무기를 점검했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투선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기쁘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전쟁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장군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육지에서 패전을 거듭한 조선군에게 이순신은 희망의 빛을 안겼다. 5월4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1차 출동에 나섰다. 협선은 승선 인원이 5명 이하인 소형 부속선이고, 포작선은 어선임을 고려하면 24척의 전선이 주력 함선이었다. 5월6일 오전에는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전선 4척과 협선 2척도 합세했다. 5월7일 새벽 가덕도 쪽으로 향하던 조선 수군은 낮 12시경 거제의 옥포 앞바다에서 50여척의 일본 군선을 발견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 등이 신기전(神機箭)을 쏘아 일본 군선 발견을 보고한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고 지시한 후 포구 앞바다로 출격하였다.
5월7일 전라좌수영을 떠난 지 4일 만에 임진왜란의 첫 해전 옥포해전이 시작되었다. 일본 측 함대 30여척은 옥포만 일대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 중이었는데, 이들은 이순신 함대를 발견하고 선봉 6척이 이순신 함대와 먼저 맞섰다. 조선 수군은 총통과 화살로 공격하였고, 일본 군선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다. 준비된 장군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강했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승전을 보고한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은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로 시작하고 있는데, 옥포해전에서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26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또 배 안에 있던 관리와 군사들 또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공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쪽으로 에워싸고 대들면서 대포를 놓고 화살을 쏘아대기를 마치 바람처럼 천둥처럼 하자, 적들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대다가 기운이 다 떨어지자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은 바다에 내던지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화살에 맞은 놈은 부지기수였고,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달아나는 놈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라는 기록에서는 치열한 전투상황이 생생하게 보인다. 승전을 거두는 과정에서 조선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접전할 때 순천 대장선(代將船)의 사부(射夫)이자 순천부의 정병인 이선지가 왼쪽 팔 한군데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밖에는 부상당한 군사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조선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을 추격해 거제도 북단에 위치한 영등포(永登浦:거제시 장목면)을 거쳐 합포(合浦: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5척, 적진포(赤珍浦:통영시 광도면)에서 11척을 격파하고 5월9일 본영으로 돌아와 다음 전투를 준비하였다. 옥포해전의 승리 이후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 함대는 5월29일에서 6월10일까지 전개된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을 활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당항포해전에서도 연이어 승전보를 올렸다. 옥포해전은 ‘바다의 전설’ 이순신 장군의 경력에 첫 승리로 기억되는 의미 있는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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