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치한약대 준비 수험생 좌절감 토로
“학원 선생님도 어떻게 지도할지 고민”
입시 전문 학원선 ‘쉬운 수능’ 설명회
학부모 카페선 정부 방침 불만 들끓어
“상위권 등급 내려가고 중하위권 혜택”
“대입 정시가 ‘수시 2탄’ 될 수도 있어”
수능 변별력 저하 부작용 발생 우려도
“‘킬러(초고난도) 문항’을 없애는 것은 여기에 길든 수험생에게 큰 손해 같아요. 학원 선생님들은 ‘준비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는 하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친구가 상당히 많아요.”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의과대학 진학을 준비한다는 4수생 김모씨는 킬러 문항을 배제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걱정이 많다고 하소연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킬러 문항 풀이에 맞춰 공부해 왔는데 갑자기 이런 방침이 나와 당혹스럽다는 얘기였다. 김씨는 “다니고 있는 학원 선생님조차 지금까지 해 오던 것과 달라져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은 주말만 되면 유명 입시 학원 강의를 들으러 상경하는 학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강모(64)씨는 “주말에는 인근에 거주하는 학생들에 타지에서 오는 학생들까지 더해져 편의점이고 식당이고 북적인다”며 “해마다 학원가를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대치동 부근 한티역부터 은마아파트입구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대로변에는 저녁 수업에 맞춰 수험생을 등원시키는 학부모들 차량과 학원 버스들이 줄지어 섰다. 인근 분식점과 패스트푸드점은 잠깐 짬을 내 끼니를 때우려는 학생들로 붐볐다.
대치동 학원가는 전국 의대를 비롯한 최상위권 대학 진학 희망 수험생들에겐 필수 코스다. 경기 용인시 한 고등학교 재학생인 김모(18)군은 “학교가 끝나면 바로 신분당선을 타고 대치동으로 온다”며 “의대를 목표로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꼭 들어야 하는 ‘이 동네 수업들’이 있다”고 전했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으려면 각 영역에 한두 문제 있는 킬러 문항을 맞혀야 하는데 이런 문제에 특화한 족집게 학원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국민의힘과 정부가 2024학년도 수능을 비롯해 앞으로 이른바 킬러 문항을 배제하고 적정 난도를 확보하겠다고 발표하자 대치동 학원가가 술렁이고 있다. 20일 찾은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변별력을 확보하되 수능 각 영역 킬러 문항을 배제하고 공교육 교육과정에서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들로만 출제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특히 수능 중심의 정시 모집에서 고득점을 목표로 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이번 정부 방침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한 해 의대 합격생을 1000명 가까이 배출하는 것으로 소문난 대치동 A학원을 다니고 있는 재수생 박모(19)씨는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수험생들은 대부분 킬러 문항 대비에 초점을 맞추는데 하루 아침에 킬러 문항을 내지 않겠다니 좌절감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학부모들 반응은 더 격앙돼 있다. A학원 학부모들이 주로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요즘 정부의 수능에서 킬러 문항 배제 방침을 놓고 분노 섞인 게시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한 학부모는 이 커뮤니티에 “(정부 방침대로라면) 결국 잘하는 학생들은 등급이 내려가고 중하위권 학생들 등급만 오른다”며 “수능이 쉬우면 재수생에게도 불리할 것”이라는 글을 올려 적지 않은 공감을 얻었다.
정부의 이번 수능 출제 기조 변화 예고로 입시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분위기도 팽배했다. 이날 오후 대치동 한 입시 전문 학원에선 ‘의치한약대(의대·치대·한의대·약대) 입시설명회’가 열렸는데 수험생 학부모 50여명이 참석했다. 설명회 강사는 칠판에 정부 발표 관련 기사를 띄워 놓고는 “수능이 쉬워지면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친구들이 더 많은 문제를 맞고 잘하는 학생이 실수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점수가 못 나올 수 있다”며 “쉬운 수능으로 간다면 수시에서 최저등급이 높은 대학을 한두 개 지원하는 게 합격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킬러 문항을 ‘사교육 주범’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만기 유웨이중앙 교육평가연구소 평가이사는 “킬러 문항이 사교육의 주범이 아니라, 킬러 문항이 출제되니까 사교육이 대비하는 것인데 선후 관계가 바뀐 것 같다”고 지적했다. 킬러 문항에 대비한 교재를 제공하고 있다는 대치동의 한 입시 전문 학원 관계자 역시 “킬러 문항은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교육 교육과정 범위 안에서 어렵게 출제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킬러 문항을 배제해 수능 변별력이 낮아질 경우 또 다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A학원 관계자는 “대학은 어쨌든 간에 지원자 중 합격자를 가려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많은 대학이 정시에서 동점자 발생 시 학생부(학교생활기록부)로 평가하는데 이 이상으로 정시가 ‘수시 2탄’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교학점제가 시행돼 내신이 절대평가가 되고 수능마저 쉬워진다면 대학은 출신 고교를 따져 볼 수도 있다”며 “자율형사립고와 외국어고, 국제고 존치 결정이 난 상태에서 고교 서열화가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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