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왕가 이야기 다룬 논픽션
‘글로벌 파워’ 되기까지 과정 담아
개혁 뒤 숨은 어두운 민낯도 공개
사우디·美 정치 역학 엿볼 수 있어
빈 살만의 두 얼굴/브래들리 호프·저스틴 셱/박광호 옮김/오픈하우스/2만5000원
“사우디에서 무슨 사업을 하고 싶습니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 총수들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대각선 방향으로 지긋이 눈길을 맞추고 있었다. 살만 국왕의 사진을 배경으로 서른여덟 살의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모하메드 빈 살만이었다.
무려 670조원 규모의 초대형 사우디 신도시 프로젝트를 비롯해 각종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는 내용보다도, 대기업 총수들이 빈 살만의 말을 경청하는 사진 한 장이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우디의 1순위 왕위계승자이자 총리, 사실상의 통치자, 추정 자산은 무려 2700조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남자’란 뜻의 ‘미스터 에브리싱(Mr.Everything)’, 빈 살만이 지난해 11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국인들에게 선명히 기억된 순간이었다.

빈 살만의 등장은 따귀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2015년 1월,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 국가방위부 병원의 정문 앞에 최고급 호송차가 멈춰 섰다. 호송차의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국왕이 될 살만과 그의 아들 빈 살만이 내렸다. 압둘아지즈가 세운 알 사우드 왕국의 제6대 국왕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죽은 압둘라 국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온 왕궁실장 투와이즈리가 복도에서 살만과 그의 아들 빈 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 182㎝의 빈 살만은 자신에게 다가온 왕궁실장의 따귀를 세차게 갈겼다. 대기실 벽 너머에도 들릴 만큼 세게. 그는 왕궁실장의 따귀를 올려붙임으로써 새 국왕 살만과 그 옆에 서있는 자신의 새로운 치세가 시작됐음을 공표했다.
처음에는 서서히 움직였다. 얼마간 압둘라 전임 국왕이 선택한 왕세자 무크린을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석 달 뒤, 무크린 사임이 발표됐다. 새 왕세자로 50대의 사촌 형 모하메드 빈 나예프가, 부왕세자로 빈 살만이 발표됐다.
국왕의 지지와 신뢰를 받던 그는 왜 곧바로 왕세자에 오르지 않고 사촌 형을 샌드위치처럼 끼워 넣은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중동 정책과 관련이 깊었다. 즉, 당시 오바마정부는 중동 지역의 안정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고, 그 중심인 사우디 왕정의 충격적인 변화보다는 질서 있는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가 새로운 미 대통령에 취임하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사우디 왕정의 안정적이고 질서정연한 변화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고, 트럼프의 핵심 측근인 사위 재러드 쿠쉬너와 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빈 살만과 호흡이 잘 맞았다. 빈 살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마단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17년 6월 늦은 밤, 왕세자이자 내무장관인 빈 나예프는 알 사파 궁전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가오는 축제일 보안상황을 논의하는 회의 참석을 알리는 전화였다. 빈 나예프는 처음 그다지 불길하게 느끼지 않았다.
빈 나예프는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곧 경호원들과 격리됐다. 그는 밤새 왕세자 사임 압력을 받았고, 결국 사임을 동의하고 말았다. 몇 시간 뒤, 빈 나예프는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왕위계승권이 박탈된 죄수가 됐고, 곧 가택 연금이 됐다. 빈 살만이 왕위계승의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순간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인 브래들리 호프와 저스틴 셱이 함께 쓴 책 ‘빈 살만의 두 얼굴’은 사우디의 실력자인 왕세자 빈 살만의 삶과 사우디 왕가 이야기를 다룬 논픽션이다. 왕가에 대한 오랜 취재를 바탕으로 두 저자는 빈 살만이라는 복잡한 인물을 흥미진진하게 추적했다.
책에 따르면, 살만 국왕의 일곱 번째 아들인 빈 살만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담을 쌓은 왕가의 골칫덩어리였다. 어릴 적 맥도날드를 비롯해 패스트푸드를 좋아해 체형이 비만해졌고, 적을 정복하는 비디오게임에 탐닉해 공부에 무관심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다른 형들처럼 유학을 떠나지 않고, 대신 늘 오랫동안 리야드 주지사를 했던 아버지 곁을 지켰다. 아버지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권력의 생리를 엿봤고, 10대 때부터 주식투자를 하는 등 경제 활동을 경험하며 돈의 속성을 배웠다.
2011년, 아버지 살만이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특별보좌관이 됐고, 이때부터 권력을 잡기 위해 행보를 시작했다. 2012년 종교 지도자 알 오우다를 만나서 그가 해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의 롤모델은 마키아벨리입니다.”
2015년 압둘라 국왕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칠십 대의 아버지 살만이 왕위에 오르자, 삼십대의 빈 살만 역시 아버지의 총애를 업고 국정을 하나하나 장악해나갔다. 국방부 장관이 돼서 예멘 내전에 전격 개입했고, 왕가의 자금줄인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도 집어삼켰다.
그는 2017년 권력승계 1순위 왕세자에 오르자마자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그해 11월 리츠칼튼호텔을 무대로 정·관계와 재계 거물들을 대거 체포했고, 유력한 왕가 인물들도 구속했다. 막대한 현금과 자산을 몰수했다. 대다수는 빈 살만에게 항복했다.

책은 빈 살만의 기행과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했다. 망설이지 않았고 때론 잔혹한 결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 뜻에 반하는 결정을 했던 토지 담당자에게 우편으로 총알을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특히, 2018년 주튀르키예 사우디 대사관에서 벌어진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을 통해서 ‘미스터 골절기’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 그의 어두운 민낯도 상기시킨다.
중동의 실력자이자 글로벌 파워 모하메드 빈 살만이 오일 머니로 창조하고 있는 사막도시의 색깔이 장밋빛일지 핏빛일지는 미래가 말해줄 것이다. 엄청난 재력과 온화한 미소 뒤에 감춰진 빈 살만의 두 얼굴뿐 아니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중동 정치의 역학도 엿볼 수 있는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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