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성보다는 합목적성을 중시.”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북한 사법제도 개관’은 사회주의국가에서의 법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구소련이 사회주의혁명에 법치주의 이론을 결합해 만든 ‘혁명적 적법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정치·경제·사회적 목적을 법적 안정성, 법적 절차보다 훨씬 우위에 두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법에 앞서는 권력을 상정한 다음 그 권력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법을 바라본다. 법은 지배계급의 의사를 표명하기 위한 형식이자 수단이다. 이는 결국 “권력에 대한 법의 지배(rule of law), 법의 우위, 법의 자율성, 절차적 정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올해 상반기 법조계를 결산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절차탁마’(節次托魔)를 들고 싶다. 서초동 지인들 사이에서 언젠가부터 우스갯소리처럼 돌고 있는 사자성어다. “절차 따위는 마귀에게 맡겨버렸나?”라는 뜻으로, ‘학문이나 인격을 갈고 닦는다’라는 뜻을 지닌 기존의 ‘절차탁마’(切磋琢磨·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다)를 변형한 것이다. “그 많은 절차 규정들이 이 땅에선 쓸모가 없네요.” 얼마 전 사석에서 한 법조인이 내뱉은 탄식이다.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옥곤)의 ‘김학의 불법 출금’ 판결은 절차적 정의가 부정당한 사례다. 재판부는 이규원 검사 등이 김씨를 긴급 출금한 것은 위법하며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당시 김씨의 출국 시도를 저지한 것은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면서 이 검사와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차규근 전 법무부 출입국 본부장 등 3명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을 공익 신고한 장준희 부장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쁜 사람으로 지목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사해도 된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사건을 수사한 수원지검은 “헌법상 적법 절차 원칙을 위반하고 수사를 부당하게 중단시킨 공직자들에게 죄에 상응하는 형이 선고돼야 한다”며 항소했고,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절차상 하자는 있지만, 무효는 아니다”. 올해 3월 헌법재판소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 유효 결정은 절차적 정의가 부정당한 대표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헌재는 “여야 동수가 원칙인 법사위 안건조정위원회에서 민형배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해 사실상 민주 4 대 국민의힘 2 구도가 됐는데도 박광온 법사위원장이 표결을 강행해 통과시킨 건 명백히 국민의힘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민의힘 의원들이 법안의 심의·표결에 참여했으니 가결 선포는 문제없다”면서 결과적으로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게는 제 껍데기에 맞춰 구멍을 판다”(요네하라 마리, 속담 인류학)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구멍을 보면 게의 등짝 크기와 모양을 알 수 있다. 절차적 정의에 대한 부정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그 구멍의 크기와 모양만큼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서 빛을 내야 할 것은 옥돌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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